[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한기호 올림’
환갑이 넘은 ‘출판계 전설’ 한기호는 나이가 반도 안 되는 젊은 기자가 사인을 부탁하며 내민 책의 앞장에 ‘한기호 올림’이라는 글을 적었다. 그 책은 한기호가 20년 동안 일간지에 게재해 온 700페이지 분량의 출판 관련 칼럼 모음집. 이 책 서문의 마지막 글자도 역시 ‘한기호 올림’이었다.
그래서 기자는 이 ‘올림’이라는 글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올림’이라는 글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편지나 선물을 보낼 때 그것을 올린다는 뜻이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드림’이라는 단어로 충분했을 그 사인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기호라는 사람에게 퍽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됐다.
윗사람에게 편지를 써봤다면 알 것이다. ‘올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어떤 ‘각오’처럼 커서, 이 단어가 붙은 글은 무엇이든 쉽게 쓰이지 않는다. 한기호의 인생도 쉽게 쓰이지만은 않았다. 1958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6남매의 장남은 고등학교 때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했고, 대학에서도 17가지 아르바이트를 해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이후 <사대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다 구속되고 대학에서도 제적당한다. 한기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금서였던 저항시인 신동엽의 시를 책으로 엮고, 역시 금서였던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 등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유통했다.
이 ‘올림’이라는 단어는 또한 제사상에 음식을 올리거나 혹은 믿는 신에게 봉헌하듯, ‘바친다’라는 단어를 연상케 한다. 한기호의 62년 인생 중 38년 세월도 그 자신을 출판계에 오롯이 바치는 기간이었다. 그는 1982년 25세의 나이로 출판계에 입문해 두 권의 책을 펴낸다. 그리고 이것을 인연으로 1983년 출판사 창비에 입사해 15년간 영업자로 활동한다. 그에게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별명을 선사한 책은 『소설 동의보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등이었다. 1998년에는 41세의 나이로 창비에서 나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한 후에는 21년간 논쟁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그리고 ‘읽지 않으면 쓰지 않는’ 출판비평가로 활동한다. 1999년 2월부터 올해 20주년을 맞이하는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를, 2010년 3월부터 책 읽고 토론하는 문화를 담은 교육잡지 <학교도서관저널>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중 <기획회의>는 출판계 종사자들에게 ‘어떤 책을 펴낼 것인가’ 하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해왔다. 또한 출판활동도 적극적으로 해왔는데, ‘북바이북’ ‘어른의시간’ ‘길밖의길’ ‘학교도서관저널’ ‘요다’ ‘플로베르’ 등의 본인이 경영하는 출판사를 통해 수많은 양질의 단행본을 펴내 왔고 그 자신도 저자로서 출판을 통해 사회를 읽는 책 20여권을 출간해왔다.
그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다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도서관과 서점에 얼굴을 내밀었던 거의 모든 책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십여명의 직원들이 땀을 흘리며 잡지와 책을 펴내고 있는 마포구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한기호를 만났다.
Q. <독서신문>의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됐다. 독자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린다.
A. 제가 명사라고 하니, 좀 이상합니다. 1982년에 출판계에 입문했으니, 올해로 38년째입니다. 제 인생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20대 후반과 30대 제 청춘을 바친 곳은 출판사 창비였습니다. 창비에서 영업자로 살았고, 1998년 IMF 직후에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마흔 즈음이었는데요. 98년부터 지금까지 21년 동안 출판평론가로 살아왔습니다.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소개하고, 출판 트렌드를 짚어주기도 하고, 베스트셀러 요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이런 일을 해왔죠. 돌아보니, 21년 동안 일간지에 칼럼을 안 쓴 적이 없습니다. 50대까지는 일주일에 20권씩 책을 읽었고, 다 읽지 않으면 쓰지 않았습니다. 그 칼럼들이 올해 1월 『책으로 만나는 21세기』로 엮여 나왔는데요. 반으로 줄였는데도 700페이지 정도 됩니다.
그리고 나이 60이 돼서야 제3의 인생을 살겠다고 하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책에 관한 담론을 담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 ‘북바이북’과 국내 최초 시니어 전문 출판사 ‘어른의시간’ 등을 통해 책을 내왔지만, 올해부터 ‘이제는 더욱 책으로 보여주자’ 하고 회사에 고참 편집자 두 명을 더 들이는 등 출판에 더욱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의 미래가 서브컬쳐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출판사 ‘요다’에서 서브컬쳐에 중점을 두고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유명해진 김동식 작가의 소설 『회색인간』 같은, 스마트폰으로만 쓴 소설 『문화류씨 공포 괴담집』 같은 책을 내고 있습니다. 또한 올해 초부터는 4090세대 여성을 위한 그림책을 펴내는 출판사 ‘백화만발’을 시작했고, 다음 달부터 책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Q. 우리나라에 한기호만큼 책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한기호에게 책이란?
A. 40대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냈고, 올해 11월 20일이면 500호가 나옵니다. 또한 책을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교육환경 활성화를 목적으로 펴낸 잡지 <학교도서관저널>도 꽤 오랫동안 내왔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저는 2,30대에는 창비에서 ‘베스트셀러 제조기’ ‘상업주의의 화신’ 등으로 비판을 받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사람이 40대 접어들면서 왜 갑자기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우고, 상업적이지 않은 잡지를 내냐는 거였지요.
당시 ‘베스트셀러보다 중요한 게 뭔가’ ‘책이라는 게 뭔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출판이라고 하는 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팔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이 팔리면 더 좋겠지만, 출판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책을 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꼭 필요한 책이란 무수한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책이에요. 단 천권이 팔려도 큰 영향을 주는 책처럼요.
안창호 선생의 말씀처럼, 한권의 책은 하나의 학교를 세우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학교 하나를 더 세우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만명이 세우면 만개가 되고, 십만명이 세우면 십만개가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각자가 학교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나 지식을 담자는 생각에 <기획회의>와 <학교도서관저널>이라는 잡지도 창간한 겁니다.
Q. 책 안 읽는 사회이기도 하고 출판시장은 늘 불황이라고 한다.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A.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는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알던 독서의 행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뭔가를 게걸스럽게 읽어대고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들은 읽기를 멈추지 않죠. 지하철에서 종이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웹툰을 읽든 웹소설을 읽든 뭔가를 읽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독서의 소외가 아니라, 독서의 범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이유는 책이 시대에 맞게 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를 보면, 읽기의 방식이 변했어요. 이제는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검색을 해요. 검색하면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명목적인 지식은 다 알려주는 세상이 왔어요. ‘검색형 독서’ '읽기의 혁명'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요즘은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연동이 되고 있어요.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이용해서 뭔가를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 뭔가를 또 열심히 쓰고 있어요. 옛날에는 전화였지만, 지금은 카카오톡으로 SNS로, 즉 ‘문자’로 의사소통하는 게 일반화됐지요. 이것은 ‘쓰기 혁명’이지요.
마지막으로, 이러한 읽기와 쓰기가 일어나는 공간이 어디냐 하는 것이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뭔가를 쓰면 즉각 타인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물질성 혁명’, 달리 말하면 ‘텍스트의 혁명’이에요.
이 3대 혁명이 굳어져 가고 있는 시대예요. 저는 이 3대 혁명이 새로운 책의 시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제 과거의 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이라는 콘텐츠가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재기 때문에 다른 책이 안 팔린다, 중고서점 때문에 새 책이 안 팔린다,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대형서점 매대가 문제다 등도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보다 새로운 정보 소비시대의 흐름에 맞는 책을 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3대 혁명의 시대에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는 세분화돼있으며, 나만 말할 수 있는 임팩트 강한 주제를 잡아야 해요. 그리고 이 하나의 주제를 풍부한 사례를 제시해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힘 있게 밀고 나가야 해요. 또한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 즉 이야기성이 강해야 해요. 달리 말하면 팩션(faction,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새로운 장르.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이지요.
Q. 『한기호의 다독다독』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등과 여러 칼럼들에서 책을 통해 사회를 비평해오셨다. “책으로 세상을 읽다”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글을 써오셨는데, 지금 우리 사회를 책으로 읽어준다면…
A. 한 서울대 교수가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래 사회는 플랫폼을 소유하고 있는 0.001%의 사람이 1계급이 되고, 엘리트 지식인, 스포츠 선수, 연예인 등 대중에게 인기 있는 0.002%의 사람들이 2계급이 됩니다. 그리고 제3의 계급은 휴머노이드, 즉 로봇, 마지막으로 제4계급은 99.997%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 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 노동 계급)입니다.
이러한 미래 사회라면, 계층이동을 위해서는 ‘1인 크리에이터’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1인 크리에이터’를 만드는 것은 상상력입니다. 따라서 ‘1인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교육처럼 정답을 맞추려 노력할 게 아니라 평상시에 상상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책이나 영화 등 콘텐츠를 보고 함께 토론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상상력이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서로 다른 것들을 융합하고 편집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토론을 하면 서로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북바이북’에서 펴낸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의 책 『이젠, 함께 읽기다』에 이런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Q. 책 『인공지능 시대의 삶』 등에서 4차산업혁명시대에 한 인간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오셨다. 새로운 시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A. 초연결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글로 연결돼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됐든, 음성이 됐든 콘텐츠 속 짧은 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능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의 사례를 들어야 합니다. 역시 다양한 사람의 사례를 담고 있는 책을 읽고 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토론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브리꼴라주형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많습니다. 책에도 많고, 인터넷에서도 쉽게 검색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지식들을 연결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바로 ‘브리꼴라주형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브리꼴라주형 지식’을 엮으면 하나의 책이 되고, 이 책은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되며, 평생 먹고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교육도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교사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참여해 뭔가를 만들고 토론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독서토론모임에 참여하기도 하고, 독서토론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기도 하는데요. 사람들이 벌써 이런 학습방식의 효과를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텀블벅’ 같은 크라우드펀딩을 할 때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아도 후원해주는 이유는 그 콘텐츠가 이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절실한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공유와 공감의 사회에서 탐욕만 드러내는 자본가는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Q. 한기호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두 권만 꼽는다면…
A. 한 권은 『신동엽 전집』입니다.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금강」… 신동엽 시인을 대학시절부터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이 책이 금서였어요. 금서였을 당시 제가 신 시인의 시들을 프린트하고 책으로 엮어서 10주기 때 시인의 시비 앞에 바치기도 했어요. 진짜 좋아했던 시인이지요. 그러고 나서 제가 편집자가 돼서 최초로 낸 책이 하나는 신경림 시인이 편한 『농민문학론』이고 다른 하나는 구중서 문학평론가가 편한 『신동엽 그의 문학과 삶』인데요. 『신동엽 그의 문학과 삶』 덕분에 창비와 인연을 맺게 됐지요. 창비와 인연을 맺고 제 운명이 바뀌었으니, 제 인생에 결정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권은 역시 금서였던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입니다. 70년대 노란색 표지가 붙은 금서 『순이 삼촌』을 제가 억지로 한 사람이라도 더 읽히기 위해서 몰래몰래 경찰들을 피해 가면서 유통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에도 전시가 되고, 현 작가가 올해 제주4.3평화상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결국 이 책이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어떤 책을 만들고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깨우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