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의 진수를 보여준 '음유(吟遊) 시인'
풍류의 진수를 보여준 '음유(吟遊) 시인'
  • 독서신문
  • 승인 2013.08.2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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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기행 '자유행복학교' _ <16> 고산 윤선도 기행기 <上>
▲ 고산 윤선도의 풍류를 음미하기 위해 전남 해남을 찾은 '자유행복학교' 회원들     
 
 
 
[독서신문] 이번 풍류기행은 조선시대 시조문학의 대가이자 한 세상 원없이 풍류를 즐겼다고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 선생을 찾아 전남 해남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 중ㆍ후기 시인이며 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ㆍ해옹(海翁)이다. 그리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광해군 4년)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과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을 보도(輔導)했다. 그뒤 형조정랑(刑曹正郞),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지냈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년) 왕명으로 복직하였으나 남인의 거두로서 서원 철폐, 효종의 장지문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 등을 놓고 송시열(宋時烈)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과 맞서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 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ㆍ복서(卜筮)ㆍ음양ㆍ지리에도 능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고산의 삶은 유배지에서의 고된 삶과 해남에서의 풍류생활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풍류를 알 수 있는 수많은 일화와 시가 있지만 지면상 대표적인 시 몇 개만 소개를 하고자 한다. 고산이 45세 때 벗들과 함께 양주의 고산 별서에서 사흘간 놀이를 하였는데 이때 지은 시에서 그의 풍류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배저어 옛 동산 찾아가니
산 빛깔 바야흐로 황혼이로다.
궁중의 술병을 낚시노인에게 자랑하니
신선의 음악이 강촌에 진동하도다.

 
호기(浩氣) 가득찬 고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고산이 50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51세 때 제주도로 가려다가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안착했는데 이때부터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불렀으며, 그뒤 문소동(文簫洞)과 금쇄동(金鎖洞)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50세 때부터 솔, 대, 매화, 국화, 연을 심어 놓고 오우(五友)라 부르며 고아한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는데, 86년 후에 태어난 고산 선생도 50대에 이르러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이라! 앞마당에 수석이 있고 뒤뜰에 송죽이 있는 수간모옥(數間茅屋) 위로 마침 환한 달이 떠오르니 이보다 더 운치있는 그림이 어디 있겠는가? 고산의 풍류는 바로 이 「오우가」에 있다. 이 다섯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고산의 풍류를 소개하고 나서 풍류기행 회원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 고산의 얼굴로 보였다. 이어서 오늘 처음 참석하신 열한 분에 대한 소개를 마치자 우리의 버스는 목적지인 해남 땅을 넘고 있었다.
 
 


낮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해남읍에 도착했다. 먼저 미리 예약해 놓은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메뉴는 해남의 대표 음식인 해물탕이다. 자리를 잡고 건배를 하려고 하니 저쪽 끝에 앉은 회원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큰 소리로 "건배!"를 외치면서 앞으로도 오늘만 같기를 기원했다. 얼큰한 해물탕에 시원한 막걸리 몇잔을 들이키고 나서 우리는 음식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산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20여분을 달린 후 우리는 차에서 내려 코스모스 핀 길을 따라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 입구로 들어서자 해설사님이 먼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더운 날씨에도 해설사님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전시관에는 우리가 책에서 많이 보아온 공재(恭齋)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이 있었다. 수염과 눈이 살아있는 듯한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공재 선생이 마치 살아서 그림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또한 전시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고산 윤선도와 해남 윤씨들이 남긴 유물 4,600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은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재 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라고 한다. 이외에도 해남 윤씨들이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영화를 느끼게 해주었다. <계속>
 
/ 윤진평 '자유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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