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으로 평가된다. 1950년을 전후해 삼성물산과 제일제당 설립으로 무역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으며,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해 수많은 기업을 일으켰다. 특히 1980년대 선구적인 시각으로 당시에는 생소했던 반도체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를 쏟아 장기적인 국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뿐만 아니라 ‘나라가 살아야 기업이 산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해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분야에서도 적극적인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우리 삶 곳곳에 녹아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을 일궈낸 인물인 만큼 명과 암이 공존하는 인물이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꼽곤 한다.
미래를 내다본 거시적인 통찰력의 밑바탕에는 꾸준한 독서 습관이 있었다. 호암의 자서전 『호암 자전』(나남)에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늘 곁에 두었던 책은 어릴 적 서당에서 배운 『논어』다. “(자신이라는) 인간 형성의 근원”이라며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논어』는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 내려온 삼성의 ‘경영 교과서’로 알려지기도 했다.
호암은 “어려서부터 나는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에서 사서(史書)에 이르기까지 다독(多讀)이라기보다는 난독(亂讀)하는 편이었다”고 회고하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경영에 관한 책에는 흥미를 느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지엽적인 경영의 기술만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무엇보다 철학을 세우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전기문학에 큰 흥미를 느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했던 호암은 임직원에게도 업무 외적인 독서를 강조했다. 1970년대 서울경제신문에 기고한 ‘재계회고’ 칼럼을 보면 이러한 면모를 잘 알 수 있다. “인사 관리나 용인(用人)을 위해서는 인간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며 “이런 뜻에서 나는 경영책임자들에게 소설을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독서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권하고 있다”고 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일에 쫓겨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기 쉬운데, 정말로 일을 더 잘하고자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일과는 관련 없는 책들을 읽어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이야기다.
같은 칼럼에서 “인생이란 다듬기 나름”이라며 불교의 격언 중 하나인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 모든 걸음이 곧 수행이다)’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이 격언의 뜻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닦고 스스로를 닦아 나가기를 멎을 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 불황 때문인지 최근 서점가에는 경제적 자유를 이룩하는 가장 확실한 비법을 한 권에 담았다는 책들이 대세다. 누군가가 먼저 시행착오를 겪으며 익힌 성공의 기술을 쉽고 빠르게 흡수할 수 있다니, 바쁜 현대인으로서 혹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책들은 그 나름의 배울 점을 갖고 있다. 호암이 그랬듯, 여러 분야의 책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갈고 닦으며 식견을 넓혀갈 때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