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를 우러르며
국화를 우러르며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09.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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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사람에게 벼슬이 있듯이 꽃에도 화품(花品)이 있다고 한다. 세종 때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 추앙받던 강희안은 당대의 선비들이 정한 화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에 의하면 꽃의 일품은 매화와 국화다.

그러고 보니 국화는 이규태의 글 「조국」(弔菊)에서 밝히듯 덕(德)과 지(志), 기(氣)를 지닌 게 분명하다. 국화는 경험상 일찍 심어도 꽃은 늦게 피어난다. 이런 국화를 바라볼 때마다 흡사 인간의 대기만성형과 닮았다고나 할까. 국화는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는 듯하다. 이런 면이 군자의 덕을 품었다는 말이 맞는 성싶다. 차디찬 서리를 맞으면 여느 꽃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이내 잃고 만다. 하지만 국화는 꿋꿋이 이겨내고 피어나니 선비의 지(志)를 갖췄다는 말도 잘 어울린다. 충분한 물이 없어도 생존하는 국화다. 비록 권력 없고 돈 없어도 떳떳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선비의 기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듯 삼륜(三倫)을 지닌 국화이니 어찌 우러르지 않으리.

작년 가을 지인이 황국 화분을 보냈다. 국화는 지나친 애정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땐 미처 몰랐다. 아파트 거실에서 제대로 햇빛을 쬐지 못하는 국화가 안쓰러웠다. 시드는 듯하여 자주 물을 준 게 화근이었다. 이내 뿌리가 썩어 국화는 생명을 다하였다. 국화는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만큼 물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이때 국화가 물이라면 질색인 것을 알고 난 후 다정도 때론 독이 됨을 새삼 깨우쳤다.

국화의 생태에 무지했던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화초 가꾸는 모습을 까맣게 잊어서이다. 젊은 시절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였다. 마당가에 온갖 꽃을 심은 것도 모자라서 집안 곳곳에 화분을 들여놓기도 했다. 이때 어머닌 국화 화분 곁에 물 한 그릇을 꼭 떠놓곤 했다. 어머닌 종이로 끈을 꼬아 국화 뿌리에 드리웠다. 또 다른 한쪽은 물그릇에 담가두기도 했다. 이렇게 물을 주어도 어머니가 가꾸는 국화는 싱싱한 잎과 고운 색깔의 꽃을 한동안 지니는 게 어린 맘엔 무척 신기했다.

꽃잎, 이파리, 뿌리가 오롯이 색다른 풍미를 지닌 식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국화란다. 이 사실을 이규태의 글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규태의 위 글을 살펴보면 “또 봄에는 싹으로 나물을 무쳐먹고, 여름에는 국화잎으로 쌈을 싸먹었으며 가을에는 국화꽃을 술에 띄워 마셨으며 뿌리로 김치를 담가 먹음으로써 뜻을 길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필자는 평소 국화차를 즐겨 마신다. 말린 황국 꽃잎을 투명한 유리잔에 넣고 따끈한 찻물을 부으면 국화향이 그윽하게 온 집안 가득 퍼진다. 또한 바짝 메말랐던 꽃잎이 뜨거운 물속에서 한껏 제 몸을 풀어 젖힌 모습은 시각적으로 차 맛을 한층 돋우기도 한다. 그 형태가 마치 유리잔 속에서 국화 꽃송이가 다시금 피어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해서다.

가을날 형형색색으로 피어나는 국화를 바라보노라면 어린 날 추억도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다. 어머니 몰래 만홧가게를 들락거리던 필자였다. 제목은 잊히었지만 그곳에서 읽는 순정만화는 필자의 눈물샘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이 만화에 흠뻑 빠진 필자는 학교만 파하면 책가방을 멘 채 동네 만홧가게로 직행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은 우리 반 교실에 비치할 거라며 국화 화분을 하나씩 아이들에게 사오라고 했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리자 어머닌 화분값을 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준 돈을 만화 보는 데 다 허비했다.

반 아이들 중 필자만 국화꽃 화분을 안 사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호명하더니 아이들 보는 앞에서 손바닥을 내놓으라 한 후 5대나 때렸다. 그때 여린 살결의 손바닥은 불이 나는 듯 아팠다. 심지어 굵은 줄이 몇 개나 설 정도로 손바닥 살이 부르텄다. 공부 시간에 연필도 제대로 쥘 수 없었다. 선생님께 호되게 매질을 당한 덕분에 만화 읽는 일에선 멀어졌다.

그럼에도 필자는 무수한 꽃 중에 유독 국화를 좋아한다. 이규태는 자신의 글에서 국화는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며 돌아오는 길에 소설백 등 8종의 국화를 들여온 게 시초라고 했다. 요즘처럼 삶이 고해(苦海)라고 여겨질 때 충숙왕이 마냥 고맙다. 덕분에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국화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삶의 시름을 달랠 수 있잖은가. 어디 이뿐이랴. 국화차의 은은한 향을 음미하는 여유마저 누리잖은가. 선선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가을밤, 말린 국화잎을 넣은 국침(菊枕)을 베고 향긋한 향기에 도취하며 단잠도 청할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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