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다리 방죽의 연가
돌다리 방죽의 연가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08.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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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귀에 익은 곡조다. “청춘을 돌려다오 / 젊음을 다오”라는 어느 유행가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먼발치서 들려온다. 이 노래를 듣자 잃어진 청춘에 대한 짙은 회한이 노래 구절 속에 깃든 듯하여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입속으로 따라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저만치 호수변에 위치한 식당에서 들려오는 노래다. 그 소리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다섯 분의 할아버지들이 둥그런 식탁을 가운데 두고 젓가락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부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젓가락 장단이다. 그 가락이 제법 리드미컬하다. 이때 구부정한 어깨, 검버섯 투성이의 주름진 얼굴, 비쩍 마른 목에 목울대를 한껏 올리며 노래를 부르는 이분들 모습이 왠지 애처롭게 다가왔다. 어림짐작만으로도 팔순을 족히 넘겼을 고령의 할아버지들이어서인가 보다.

할아버지들의 이런 모습은 가끔 이곳을 산책할 때마다 목격되곤 했다. 호숫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철, 혹은 감나무의 풋감 과육이 살이 오를 이맘때쯤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담을 나누는 모습도 종종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분들은 아마도 노년에 찾아오는 고독과 쓸쓸함의 두꺼운 외투를 저마다 걸친 게 분명하다. 술로써나마 지금 그것을 애써 벗으려고 안간힘 쓰는지도 모르겠다.

호수변 식당 앞을 지나치노라면 식탁 위에 얼큰하고 구수한 내음의 매운탕이 냄비 속에서 펄펄 끓곤 한다. 이곳에 모인 할아버지들은 그것을 안주 삼아 텁텁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제각기 지닌 삶의 애환을 토로하기 바빠 보였다.

어느 지역이든 호숫가나 아님 큰 저수지 주변엔 꼭 민물 매운탕 식당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필자가 사는 고장 이곳 오송 연제리 돌다리못에도 근접한 매운탕 전문 식당이 있다. 어찌 보면 전문 식당이라기보다 허름한 선술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할아버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식당 앞에 이르노라니 할아버지들 얼굴이 어느 사이 불콰해졌다. 벌써 술잔이 몇 순배 돌은 듯 아까와는 달리 젓가락 장단도 리듬을 잃고 제멋대로다. 

그분들은 술에라도 잠시 의존하는 오늘 이 시간만큼은 못내 행복해 보인다. 그동안 세상으로부터의 고립 및 단절인 가슴 속 빙하가 봄눈 녹듯 녹아내리는 순간이어서인가 보다. 그래서일까. 마냥 기분 좋은 표정들이다. 할아버지들의 이 모습에서 지난 젊은 날, ‘노인들은 노후엔 무슨 희망으로 삶을 꾸려갈까?’라는 의아심을 지녔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막상 필자가 황혼에 이르고 보니 비로소 그 소망이 참으로 단순함을 깨닫는다. 지난 시절 온갖 욕망을 지향했던 것과 달리 노인들은 오로지 자식의 무탈과 당신 자신 건강만이 절박한 바람일 것이다.

이곳 돌다리못을 산책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사람의 뒤태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노인의 경우 먼발치서 뒷모습만 바라봐도 그분들의 심리 상태를 짐작할 만하다. 대부분 노인들은 몸매가 어설프다. 이런 체형의 노인을 보면 얼굴 표정 또한 음울하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힘없이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엉거주춤 발걸음을 내딛는다. 건강이 안 좋다는 증표다. 그러나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일부 노인들은 어깨를 활짝 펴고 걸음도 활기차다. 

이 노인들께도 한때는 푸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은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청춘이 분명코 존재했을 터, 하지만 흐르는 세월과 그동안 고단한 삶이 이들의 청춘을 앗아갔다. 할아버지들은 어떤가.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만큼 젊어서는 패기와 용기도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잖은가. 제아무리 양귀비 같은 미모도 그토록 풋풋했던 청년 시절도 흐르는 세월을 비껴갈 순 없다.

노년의 삶은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하다고나 할까. 더구나 대부분 대한민국 노인들은 병마와 외로움 그리고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자식들 키우느라 자신의 노후 준비엔 소홀했다. 이런 연유로 하루살이가 벅차고 힘겨울 수밖에…. 무엇보다 힘든 것은 배우자를 잃고 홀로 지내는 일이다. 말벗도 없이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들이 겪는 외로움을 어찌 필설로 다 형언하리오.

날만 새면 필자가 사는 아파트에 위치한 돌다리못 둘레길을 근동에 사는 노인들은 어김없이 찾는다. 터벅터벅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보며 걷는 노인, 중풍을 얻어 반신불수의 몸으로 이곳을 찾는 할머니 등 호수 둘레길엔 새벽 운동 나온 노인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노년의 적은 질병과 가난일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은 사회적 고립과 단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노화야말로 죽음 못지않게 두렵다. 이런 생각에 잠길 즈음 갑자기 노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려온다. 돌다리못에서 이 노랫소리를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순 없다. 하지만 그분들이 무병장수하여서 행복의 합창을 자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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