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마흔, 박완서가 선택한 삶
여자 나이 마흔, 박완서가 선택한 삶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4.1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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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 작가가 타계한 지도 어느덧 십 년이 넘었다.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박완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박완서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박완서 연구자이자 여성학자인 양혜원의 책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는 박완서의 삶과 글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의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에는 남편의 불륜 때문에 얽히게 된, 완전히 다른 두 여성이 나온다.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현금’과 가부장제에 순종하며 사는 ‘수경’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2000년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정숙한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고 남의 가정을 깨뜨리려 하는 현금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현금은 오히려 수경이 시어머니의 뜻에 따라 성감별 낙태를 한 것을 두고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여자”라고 평가한다. 박완서의 작품들에는 이렇듯 남들이 보지 않는 부분을 보는 예리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어린 시절 박완서는 깨인 생각의 소유자였던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 가며 뒷바라지를 했다. “아들도 그렇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집이 많지 않던 시절”이니 비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통에 오빠가 죽었다. 박완서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 공부를 이어가기보다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선택했다. 못다 이룬 학문의 꿈이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았다.

그러고는 1970년 등단하기 전까지 내내 전업주부로 살았다. 결혼 후 십 년간 쉴 틈 없이 다섯 아이를 낳아 길렀고, 막내가 학교를 들어가던 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졸린 눈을 비비며 쓴 소설로 등단을 했다. 박완서의 당선 소식을 알리러 온 기자는 박완서를 앞에 두고도 작가 박완서를 찾았다고 한다. 평범한 주부의 모습을 한 박완서는 여성 작가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세련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완서에게 글쓰기는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간절한 일이었다.

박완서처럼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가 평생 남편의 밥상을 차렸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다. 심지어 집에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도 그랬다고 한다. 박완서 세대에겐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1970년대 중반에 쓰인 에세이에서는, 밤새 글을 쓰고 아침에 겨우 일어나 남편의 출근 시중을 들던 박완서가 “당신은 낮에 일하고, 나는 낮에도 밤에도 일하고, 그만 했으면 우리도 좀 평등해 봅시다”라고 불평했던 일화가 언급된다.

하지만 57세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석 달 후 사고로 아들마저 잃고 나니 그렇게 불평할 데조차 없었다. 박완서는 중년의 나이에 홀로서기의 진통을 겪었다. 이미 작가로서는 견고한 입지를 다졌고 돈도 벌 만큼 벌었지만, 완전히 홀로 남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들을 잃고 세상을 향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묻던 그는, 한 수녀의 말을 듣고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작은 사고의 전환이지만 박완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자기가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까운 사람들만 사랑하고 그 밖의 세상에는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그는 더 큰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전쟁과 죽음으로 얼룩진 박완서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그의 생각을 날카롭게 벼려 주었고, 인생의 곡절은 그의 품을 넓어지게 했다. 늦었다고 여겨질 수 있는 마흔 살에 시작한 글쓰기가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도구가 됐다. 시대를 앞서간 박완서의 삶과 글은 지금도 많은 여성들에게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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