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파면" 결정문 읽은 문형배 권한대행, 20년 쓴 '독서 일기'에는...
"윤석열 파면" 결정문 읽은 문형배 권한대행, 20년 쓴 '독서 일기'에는...
  • 유청희 기자
  • 승인 2025.04.0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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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MBC 뉴스특보(2025.04.04) 캡처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헌법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 (…)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4일 헌법재판소가 드디어 탄핵 선고를 내리면서다. 헌법재판관 8인의 만장일치였다. 무려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지 111일째의 일.

오랫동안 판결을 지연해왔기에, 헌재가 선고일로 예정한 오늘(4일) 11시. 많은 국민들이 거리에서, 또 각자의 공간에서 뉴스로 선고 중계를 지켜봤다. 최종 선고 즈음부터 몇 분간 메신저 서비스인 카카오톡에는 일시 장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결과를 떠나) 얼마나 이번 사태에 많은 에너지와 관심을 쏟았는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 독서인들 사이에는, 이날 결정문을 읽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독서 일기’ 기록도 화제였다. 그가 ‘착한 사람들을 위한 법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20여 년간 운영한 블로그의 ‘독서 일기’가 입소문을 타면서다.

문형배 대행의 블로그 '독서일기' 카테고리 캡처. 

블로그를 살펴보면, 문 대행의 독서 스펙트럼은 말 그대로 방대하다. 학자들의 고전부터 저출생, 사회 불평등 문제 등 지금 시대의 다양한 담론을 아우르면서다. 뿐만 아니라, 소설에 대한 취향도 다양하다. 특히 소설 파트는 4.3 항쟁을 비롯해 역사적 사건을 담은 한강 작가의 소설부터, 일본의 인기 라이트 노벨 소설까지 고루하지 않다.

책을 분류하는 체계부터 남다르다. 자신의 블로그의 총 23개 카테고리 중 절반 가까운 12개 카테고리를 ‘독서 일기’로 지정 중인데, ‘인문’, ‘소설’, ‘역사’, ‘정치사회’, ‘희곡’ 등 보편적으로 분류되는 체계뿐 아니라 ‘성찰’, ‘책에 대한 책’으로까지 카테고리를 나누고 있다.

장애, 문화자본, 소수 인종...사회 공부하는 책장

문화와 취향이 계급에 의해 구별지어 나타남을 보여주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상'(왼쪽부터)과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2020년 출간된 '마이너 필링스' 영어판은 『뉴욕 타임스』 논픽션 분야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각종 유력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가장 많은 독서 기록을 남긴 카테고리는 역시 ‘정치사회’ 분야다. 4월 4일 기준, 총 279개의 글이 기재돼 있다. 고전과 지금 시대 연구자와 운동가들의 책을 오간다. 세 번째 읽었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사실과 타당성’,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텔레비전에 대하여, 구별짓기),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등 세계 학자들의 고전, 또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박경석 활동가의 ‘출근길 지하철’ 등이 함께 올라와 있다.

또한, 오찬호 박사의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으로 자신의 성별과 인종 정체성을 첨예하게 언어화하는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도 읽었다. 사회 불평등을 비추는 책이 많지만, 한국과 해외의 사회 정책과 내용을 정리한 책들도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한강 소설부터 '라노벨', 추리소설까지

소설 분야 아카이빙이 인상적이다. 말했듯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는 소설뿐 아니라, 라이트노벨, 추리소설 등 편견 없이 여러 분야를 탐독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그리고 일본의 라이트 노벨로 국내에서도 사랑받은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가 인상적이다. 도스토옙스키, 스콧 피츠제럴드, 톨스토이 등 잘 알려진 고전 소설, 그리고 마이 셰발, 페르 발뢰가 쓴 추리소설 '테러리스트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도 그의 독서력을 알게 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왼쪽부터)와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그리고 북유럽 추리 소설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테러리스트'.

누구나 죽을 때까지 산다. 죽는 날이 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의 사쿠라도 몇 달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묻지 마 살인사건에 희생된다. 시한부 인생의 장점은 삶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허무를 느낀다는 것. 존재와 허무 사이에 왔다갔다 하다가 죽는다. -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 대한 문 대행의 메모.

문 대행은 독서 일기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한 ‘개괄’ 파트와, 인상 깊은 문장을 옮긴 ‘발췌’로 나눠 기록한다. 마지막에 짧게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는 ‘소감’ 파트도 있지만, 발췌만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아카이빙이자, 공부 기록인 셈이다. 한편, 문 대행은 최근 헌재 업무 시간에 독후감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어떤 매체에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읽은 책을 보면 이는 사실상 다양한 사회에 대한 공부인 셈이니 판단은 개인의 몫일 테다.

책 읽기, 경계를 벗어나는 최소의 공부

사람들은 말한다. 누가 어떤 책을 읽는지가 그 사람을 알려준다고. 그런 면도 있겠지만, 한 사람을 그가 읽은 책으로만 판단하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요즘 말로 ‘올려치기’나 ‘내려치기’하기 쉽다. 다만, 문 대행의 독서 기록은 중요한 권한을 지닌 사회의 전문가가, 자신이 속한 위치와 다른 곳에 서 있는. 다양한 환경의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공부의 흔적처럼 읽히는 건 사실이다. 한 명의 개인으로서 지식 탐독만이 아닌 다양한 문학을 향유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본래 문학을 필두로, 책이란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타인이 되는 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좁은 엘리트 사회에 유폐되기 쉬운 공직 사회 종사자들이 필수로 다독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오늘(4일) 파면 됐다. 새로운 대통령은 과연 책 읽는 대통령이 될까. 그 누가 국가의 수장이 되든 새로운 세상을 위한 변화는 계속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수많은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책과 함께.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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