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기억』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
[니가 사는 그책]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기억』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6.10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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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판타지 소설 『기억』이 출간되자마자 대형서점의 주간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며 흥행하고 있다. 이 소설은 베르베르의 다른 소설들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뚜렷하다. 기억과 역사는 진실이 아닐 수 있으며, 조작되기가 쉽고, 사람들은 그 조작된 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 

소설의 주인공 르네 톨레다노는 역사 교사다. 그는 학생들에게 역사의 정설(定說)이 아닌 이설(異說)을 소개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들이 잘못됐을 수도 있음을 가르친다. 가령 우리는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에 대해 황소의 머리를 한 잔인한 괴물 미노타우로스 신화로 기억한다. 아테네인들이 미노타우로스에게 젊은 남녀 일곱명씩을 바쳤고,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가 그러한 패악을 처단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톨레다노에 따르면, 이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다. 고대 크레타는 그리스보다 앞서 평화롭고 세련된 문명을 꽃피웠다.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견고한 배를 만들었고, 도시들은 더 세련됐으며, 문명은 한층 수준이 높았다. 미노스인은 지중해 연안 전역에서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쳤으며 그리스인보다 막대한 부를 누렸다. 

미노스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단지 미노스인이 그리스인보다 폭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미노스의 도시를 파괴하고, 부를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남자들을 노예로 만들고, 서적을 불태우고 나서 영웅 테세우스 신화를 만든 것이다.   

톨레다노는 로마와 포에니 전쟁으로 맞붙은 카르타고의 역사도 불완전한 역사라고 주장한다. 카르타고가 로마에 멸망했고, 카르타고의 역사가들이 모두 살해당했기 때문에 미화된 로마의 역사만이 후세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톨레다노는 카르타고가 사실 이탈리아 북부의 민족들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한 해방군이었으며, 적들을 학살하지 않았고, 폭력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같은 맥락으로, 오늘날 프랑스인의 조상인 갈리아인이 야만적인 종족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그들의 역사가 오직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경쟁자인 폼페이우스를 견제하고 로마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사실관계를 중요시하기보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해 한 로마인이 야만 종족의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렇게 톨레다노가 역사의 불완전성을 설명한 뒤에, 베르베르는 소설 속에 실존 인물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이식 실험’을 풀어놓으며 불완전한 역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위험할 수 있음을 말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인간 기억 전문가인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이식 실험’은 이렇다. 로프터스는 피험자들에게 “당신 가족한테서 당신이 어릴 때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었다”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두 가지는 사실이고 한 가지는 지어낸 이야기였다. 가령 그는 “당신이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당신을 쇼핑몰에서 잃어버려 안내 방송으로 찾은 적이 있다” “당신은 개를 쓰다듬어 주다가 개에 물린 적이 있다” 같은 거짓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그리고 몇 달 뒤 로프터스가 피험자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34%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장담하며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까지 했다. 비슷한 실험으로, 로프터스는 피험자에게 어렸을 때 방울양배추와 아스파라거스를 아주 좋아했다고 말해줬고, 이후 피험자의 입맛에 변화가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과서에 실린 공식 역사조차 자의적인 재단(裁斷)의 결과물인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글자를 가졌던 문명들이 남긴 흔적이죠. 그중에서도 또 역사가들이 존재했던 문명들이 전하는 과거가 전부예요. 게다가 모두 승자의 버전이고.” (67쪽)

“대량 학살자에게 영웅의 지위와 훈장이 주어지죠. 그러면 승리한 쪽의 역사가들이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중과 후세에게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파하는 거예요.” (68쪽)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돈주머니를 찬 권력자의 명령을 따르는 그 역사가들이 사실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말아요. 희생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희생자로 둔갑시켜 버리는 거죠.” (69쪽)

“실제 벌어진 역사와 기술된 역사, 피지배자의 역사와 지배자의 역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에서 기억은 사활이 걸린 문제예요. 그래서 수많은 정치인이 기억을 거머쥐고,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주물러 빚으려고 하는 거죠.” (71쪽)

베르베르는 톨레다노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하며 본격적으로 전설 속에 존재하는 섬 아틀란티스를 끌어들인다. 진실한 역사가 거짓에 의해 왜곡돼버렸듯, 과거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로마 철학자 프로클로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기록한 아틀란티스 역시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톨레다노는 최면을 통해 아틀란티스로 정신적인 모험을 떠난다. 이렇게 소설은 역사 논쟁에서 벗어나 점차 재미로 나아가지만, 베르베르가 『기억』을 통해 진짜로 말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게으름 때문에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과거의 실체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나, 결국 똑같이 과거를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해요.” (66쪽) 

“앞으로 교양 없고 무식한 다음 세대가 도래할 일만 남았어. 교과서 내용을 앵무새처럼 읊어 댈 줄만 알고, 뉴스와 부모의 말을 여과 없이 자기 생각으로 삼고, 광고와 인터넷에 휘둘리는 세대 말이야. 그들은 자기 생각도 없고 그걸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없어. 이미 만들어진 생각에 그저 동조할 뿐이지.”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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