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상처받은 곳에서 카메라를 들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
[포토인북] 상처받은 곳에서 카메라를 들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02.12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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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이 책의 저자는 카메라를 통해 자기 자신, 사람, 세상과 만나가는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전하는 사진심리 상담사다. 북한과 이라크 현장을 누비던 '잘나가는' 사진기자였지만, 어느 날 신문사를 그만두고 돌연 캄보디아로 떠난 저자. 그는 그곳에서 국제구호기관에서 일하며 무료 사진관을 운영하다 귀국해 아픈 사람들 곁에서 '사진치유' 작업을 시작했다. 

'사진치유'란, 누군가가 고통을 겪은 장소를 '대면'하고 마주서는 행위를 사진 찍는 행위로, 트라우마와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저자는 '행위 중심 사진 치유'라고 일컫는데, 책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 카메라를 매개로 많은 이들의 상처와 마주했던 저자의 기록이 담겼다. 

[사진=도서출판 소동]
황의수씨. [사진=도서출판 소동]

1980년 당시 도청 앞 전일빌딩 후문 계단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온몸을 군홧발로 짓밝혔던 황의수 씨는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2013년 여름 33년 만에 처음으로 그 계단을 찾아갔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이 자리에 다가갈 수 없었다. 군홧발에 채이고 아스팔트 위에 머리가 짓이겨졌던 당시의 소름 돋는 기억이 그렇게 만들었다. 근처를 가기만 해도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계단 앞에 선 황의수 씨는 온몸이 경련이 일 정도로 힘겨워했다. 첫 경험 이후로도 황의수 씨는 꾸준하게 이곳을 다시 찾았다. 공포의 기억이 다시 그를 감싸 안았지만 몇 번의 반복되는 걸음 속에서 한결 차분해지는 감정을 경험하게 됐다. 어느새 마디가 굵어지고 주름이 가득한 화의수 씨의 손, 그 손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들려있다. <126~127쪽>

남영동 대공분실 계단. [사진=도서출판 소동]
남영동 대공분실 계단. [사진=도서출판 소동]

37년 만에 그 계단을 오르면서 그녀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그전에는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것이고 지금은 스스로 찾아온 것임에도 그녀는 떨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전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 앞에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마당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눈 둘 데를 찾지 못한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느 한 자리에 시선을 모으지 못했다. 37년 만에 찾아온 이곳에서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그럼에도 다시 남영동을 찾았다. 반복적인 방문이 계속 이어졌다. 지속적으로 치러진 상처와의 대면은 두려움과 분노심을 가라앉혔다. 이제 보이지 않던 사방이 정확하게 인지되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원형 계단을 다시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판 계단이 내는 소리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면서 두려움을 털어내는 자신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드디어 어느 날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수사실에서도 웃을 수 있게 됐다. <143~144쪽> 

[사진=도서출판 소동]
[사진=도서출판 소동]

한때 가정폭력에 치여 세상을 떠도는 가출 청소년들과 소박하게나마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대부분 거리를 집 삼아 지내거나 같은 처지의 또래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지내면서 거친 세상 속에 몸을 맡겨버린 아이들이다. 어설픈 동정심으로 물적 도움을 주려 나선 것은 아니고 가정과 사회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아직은 꿈을 잃지 말자는 얘기를 나누는 이들의 자리에 감사하게 낀 일이었다. 매주 가만히 귀를 기울이거나 시선을 건네는 일로 아이들 곁에 몸을 들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세상에 지지 않으려는 듯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고 연신 담배를 꼬나물었지만 그들의 거친 눈동자 뒤로 맑고 여리게 흔들리는 눈빛은 어김없이 눈에 들어왔다. <194쪽> 

가수 김광석. [사진=도서출판 소동]
가수 김광석. [사진=도서출판 소동]

우연한 만남도 꽤 있었다. 찻집, 길거리 등지에서 광석이 형은 내 눈에 자꾸 띄었다. 마음이 꽂히니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도 운명처럼 주어졌다. 성루 홍대 앞 한 술집에서 만났을 때는 용기내어 다가가 은박지에 쌓인 '키세스' 초콜릿을 건네기도 했다. 정말이지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런 내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형은 손수 캔맥주를 하나 사서 내 손에 쥐어주고 고맙다는 말까지 해줬다. 감동 또 감동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어느 날에는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전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형은 흔쾌히 내 수첩에 주소를 적어줬다. 이후 두 번에 걸쳐 꽤 많은 양의 흑백사진들을 고이고이 포장해서 소포로 전달해 줬다. 사진이 마음을 담은 선물이 될 수 있음을 그때 알 수 있었다. <224쪽> 

북한. [사진=도서출판 소동]
북한 주민. [사진=도서출판 소동]

그곳에서 나는 '사람'을 봤다. 살아가는 삶의 단상이 남녘땅 어디에서나 보고 듣는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새롭게 '보고 들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념과 체제의 장벽 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삶과 존재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깊은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만큼 가슴 벅찬 알아차림이었다. 박백년 넘게 한쪽 면만 보고 따져 묻던 시선을 거두고보니 그들의 말처럼 사는 것이 다 똑같은 우리네 정경이었다. 마주하는 모든 찰나들을 놓치지 않으려 나의 카메라는 내내 춤을 췄다. <279쪽>

『당신 곁에 있습니다』
임종진 지음 | 임종진 사진 | 소동 펴냄│368쪽│1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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