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의 지배욕을 찬양하며
뚜껑의 지배욕을 찬양하며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0.02.1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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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실수는 두 번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주부로서 집안 살림엔 이골이 났건만, 왠지 요즘은 집안 살림이 버겁게만 느껴진다. 집안 청소는 물론이려니와 정리 정돈도 대충한다. 이는 몇 년 전부터 건강을 잃은 후, 가까스로 집안일을 해온 게 몸에 배여서일게다.

무엇보다 요리를 할 때 고춧가루, 깨소금 등이 들어있는 양념 통들을 사용 후엔 필히 마개를 꼭 닫았어야 했다. 평소 집안일이 힘에 부친 탓에 매가리 없이 행하다 보니 어느 땐 양념 통 뚜껑조차 닫는 일도 귀찮아 제대로 닫지 않은 듯하다.

며칠 전 일이다. 김장김치에 신물이 난 입맛을 달랠 요량으로 배추로 겉절이를 하느라 내 딴엔 분주했다. 겉절이 양념으로 마늘, 양파, 배, 마른 붉은 고추 등을 갈아 넣고 양념을 만들 때이다. 무심코 고추 가루가 든 양념 통을 들었다. 이때 마개만 손에 잡히고 통이 그만 땅에 떨어지면서 통 속의 고춧가루가 주방 바닥에 쏟아졌다. 얼마 전에도 친정에서 참기름 한 병을 얻어오며 버스 안에서 쏟아져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주위에 진동한 적 있다. 살펴보니 허술하게 닫은 참기름 병마개가 그 원인이었다.
이로 보아 한낱 뚜껑이 지닌 역할이 참으로 지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물질을 담는 모든 용기엔 필수적으로 뚜껑이 존재한다. 하다못해 장항아리도 장독 뚜껑이 바실루스균의 발효를 돕는 역할을 해내지 않던가.

통을 비롯 병, 상자, 항아리 등에 담긴 물질을 보관 및 보전하는 방편으로 꼭 마개가 필요한 것이다. 요리할 때도 솥이나 냄비 뚜껑을 잘 닫아야 음식이 설익지 않고 제맛을 낸다. 가령 술만 해도 그렇다. ‘글렌피딕 50년산’, 병 전체가 24k 순금 도금으로 병 값만 백만원이 넘는 600병 한정으로 프랑스에서 생산해 낸 ‘프랑소와 라벨레 후라팡’, 4kg의 백금과 황금, 6,500개의 다이아로 장식돼 딱 한 병만 출시된 20억원이 넘는‘헨리 4세 두도뇽 헤리티지 디엔에이 코냑’등은 세계 최고급 명품 술로 손꼽힌다. 만약 이 술들도 술병 뚜껑이 부실하다면 정녕 명품 술로서 그 명성을 지닐 수 있었을까? 술병 뚜껑이 없다면 술의 주요 성분인 알콜이 전부 증발돼 명품다운 술맛은커녕 맹물이 됐을 법하다. 뿐만 아니라 만약 도로에 맨홀 뚜껑이 열렸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이러한 뚜껑도 때론 무기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으니 매실액 담은 것을 거르려고 플라스틱 통의 마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펑!’하는 굉음과 함께 플라스틱 통의 마개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정확히 나의 얼굴을 급습했다. 그 바람에 뚜껑이 내 얼굴을 세차게 때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 힘이 얼마나 세던지 마치 주먹으로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 눈에서 불이 번쩍 나며 얼얼했다. 통 안에서 매실액이 발효되며 생성된 가스의 위험을 미처 감지 못한 탓이다. 덕분에 시퍼런 멍을 얻어 한쪽 눈에 며칠 안대를 하고 지내야 했다.

플라스틱 통 마개로부터 갑작스런 기습(?)을 당하고 보니 그것이 흡사 친구 남편의 기세와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친구 남편이 전과 달리 요즘은 직장 퇴직 후 부쩍 잔소리가 심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은 끝까지 아내에게 관철시키는 일에 주력한다고 했다. 어느 땐 말다툼 끝에 집안 살림도 마구 내던지는 폭력성도 엿보인단다. 친구 남편은 본디 젊었을 때부터 부엌 출입을 금기시했단다. 친구가 밤늦게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침밥 먹은 그릇들이 싱크대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건만 자신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시청한다고 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라면도 끓일 줄 모르고 아내가 퇴근하도록 배를 주리고 기다리고 있기 예사란다. 평소 스스로 물 한 잔도 갖다먹지 않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십 년을 생활하며 남은 것은 화병뿐이라는 친구의 푸념이다.

이런 친구의 말을 들을 때마다 르완다 속담이 떠오르곤 한다. “나쁜 가정은 물을 긷고 땔감을 마련하도록 당신을 내보낸다네” 이 속담이 내포한 의미는 남편이 아내 대신 집안일 하는 것을 용인해 버리면 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며, 남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한편으론 이 땅의 다수 남편들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등골이 휘고 있잖은가. 아무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됐다 해도 남편들의 이런 희생이 밑거름이 돼 우리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에 어찌 보면 친구 남편도 그동안 마치 명품 술병의 뚜껑 노릇을 해왔다면 지나칠까. 경쟁 사회에서 부대껴 힘들고 지쳐도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소중한 가족들을 목숨처럼 지켜온 가장이 아니던가. 만약 그가 지난날 가정에 소홀했다면 어찌 오늘날 친구의 가정이 건재하겠는가. 비록 친구 남편이 이즈막도 남성 권위주의의 견고한 갑옷을 벗지는 못했으나, 아직도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가정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주효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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