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그윽한 품에 안기며
밤의 그윽한 품에 안기며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11.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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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연꽃이 아로새긴 등잔걸이다. 그 위에 백자 호롱을 얹자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서재에 놓인 이것을 대하노라니 어린 날 외가에서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전깃불이 안 들어오던 외가 마을은 가가호호(家家戶戶) 등잔불로 밤을 밝혔다.

이때 집집마다 한지로 바른 방문이나 창에 어리는 가솔(家率)들 옷을 바느질하는 다소곳한 아낙네 모습이며, 호롱불 아래 책을 읽는 어린아이 그림자는 먼발치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고즈넉함으로 이끌곤 했다. 가로등도 없던 시골 마을, 깊어가는 동장군(冬將軍)의 겨울밤 밝혔던 등잔불이 하나둘 빛을 잃으면 온 동네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마을에 내린 그 어둠이 어린 마음엔 마냥 두렵기만 했다. 하여 화장실 출입도 제대로 못 했었다.

그때와 달리 이즈막은 왠지 어둠이 좋다. 캄캄한 밤은 나의 심신을 고요 속에 머물게 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요즘 밤이 안겨주는 정적에 한껏 매혹당했다. 그동안 삶의 방향성을 잃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평소 꿈꾸어 온 일들이 다소 목적 달성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론 왠지 성이 차지 않는 기분이었다. 더 높은 곳, 많은 것을 탐하기 위해 안간힘 쓰느라 아등바등했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의미 있는 삶의 지향점을 잃고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보름달이 은은히 소창小窓을 비추는 달밤에는 휘황한 문명의 불빛을 꺼본다. 그리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집안으로 달빛을 모셨다. 희미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모처럼 자신을 성찰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매사를 서두르기 예사 아니었던가. 기다림을 망각한 채 오로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조급증에 시달렸던 지난 삶은 아니었는지 새삼 뒤돌아본다.

하루하루를 마치 종잇장처럼 얇은 심연이 지배하는 삶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삶에 대한 명상이나 관조와는 거리가 먼 즉물적(卽物的)인 사고에만 길든 게 그것이다. 이로 인해 진정한 삶의 가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가시적인 일에만 매달려온 듯하다.

요즘은 나의 존재가치를 어디에서 추구할까? 밤마다 이런 문제를 고뇌하는 날이 잦다. ‘철들자 망령’이라고 이제야 나를 깊이 응시하는 시간을 가져본 결과이다. 이 또한 벌건 대낮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밤에만 오롯이 갖게 되는 사색이자, 삶에 대한 서사敍事의 시간인 셈이다.

혹여 초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쏟아지는 밤이 찾아오면 다시금 집안의 불빛을 차단하련다. 그리곤 그윽한 불빛의 등잔불이나 촛불을 밝혀 그 불빛 아래서 모처럼 삶을 깊이 사유하는 시간으로 겨울밤을 충만 시킬까 한다. 이때 집안에 무쇠화로를 장만하고 잉걸불의 화롯불에 밤이며 고구마를 입술이 새카맣도록 구워 먹으면서 정겨운 이들과 밤새도록 정담을 나누련다. 지난 시간 문명의 불빛에 각성된 냉철한 이성, 헛된 욕망, 이기심 따위 등을 가슴 속에서 남김없이 내려놓을까 한다. 한편 온 집안을 밝혀주는 따스한 호롱불 빛에서 가슴 가득 이타심을 얻어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고통 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의 눈도 한껏 키우련다.

위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 연유는 이즈막 광명천지 대낮보다는 온 사위(四圍)가 어둠 속에 잠기는 밤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사실 눈 부신 빛은 때론 우리에게 폐해로 다가오기도 하잖는가.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에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운동 경기로 말미암아 경기장 휘황한 불빛이 공해로 작용한다는 도심지 어느 마을 주민의 하소연을 시청한 적 있다.

이게 아니어도 가끔 집안의 전등을 전부 끄고 그 속에서 어둠이 나를 온전히 삼키도록 기다려 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덕분에 어느 사이 마음을 밝히는 따스한 한 줄기 빛을 가슴에 한껏 간직하게 됐다. 어둠쯤은 너끈히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생긴 것도 최근의 일이다.

밤은 하루의 귀결이자, 내일을 준비하고 계획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파편화된 삶 속에서 물질의 질량만 좇느라 놓친 내 안의 주체성과 소소한 행복도 밤이 안겨주는 평온 속에서 새삼 감지하곤 한다. 정의로운 삶은 과연 무엇이며, 불의 앞엔 어떤 처신을 해야 하나? 하는 번뇌와 나만의 잣대로 함부로 예단 된 삶에 대한 오류는 없었는지도 잠자리에 들면서 밤에 써 보는 내 마음의 일기이기도 하다. 이렇듯 어두운 밤은 내게 내일을 옹골찬 일상으로 꾸리게 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설계도를 가슴으로 그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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