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심미주의자’ 윤광준, 1959년생.
그의 인생은 요즘 말로 치면 소위 ‘스웨그’(자신만이 갖을 수 있는 특정한 멋과 분위기)가 있다.
“나는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변화가 절박했던 시점이었다. 그곳에 그대로 남아서 맞이할 미래의 느슨한 모습이 끔찍했다. 정신 번쩍 들게 할 긴장이 필요했다. 바다에 뛰어들면 1%의 생존확률이 있고, 그대로 남으면 죽음뿐인 난파선에 탄 선원의 심정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바다에서 살 길은 스스로 헤엄쳐 나가는 것뿐이다.” (『마이웨이-윤광준의 명품인생』 )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후 예술잡지 <마당>과 <객석>에서 사진기자, 웅진출판 사진부장을 거친 윤광준은 “과거의 안정과 얄팍한 자부심”에 기대지 않았다. 1996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목숨 내놓고’ 미(美)라는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에 그는 풍덩 뛰어들었다. 한 번 사는 인생, 회사에서 나이만 먹어가는 선배들처럼 되기 싫었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좇아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심한 즉시 없는 돈을 털어 작업실을 마련했다. 작업실을 공유한 소설가 김훈 옆에서 손가락이 부러지나, 자판이 부러지나 자신과 경쟁하며 글을 썼고, 작가가 됐다. 그리고 그는 20년 전 그 선택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으로 꼽는다. 한 푼도 못 벌 정도로 고달팠던 적도 있지만, 덕분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스스로 구한 밥과 선택으로 세상을 사는 맛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한다.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다 해봐야 아쉬움이 덜하다. 색다른 맛의 도전도 인생의 풍요를 누리는 한 방법” “마니아의 희열은 감추어진 진실을 파헤쳐 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지난한 시간의 허비와 쓸데없어 보이는 노력을 통해서만 실체가 느껴진다”라는 그의 말처럼 윤광준은 본업이었던 사진을 넘어, 오디오, 음악, 미술, 건축, 디자인 등에 폭넓고 깊은 저술을 해냈다. 직접 저술한 책만 13권, 공저로 출간한 책을 더하면 20여 권이다.
『잘 찍은 사진 한 장』, 『내가 찍고 싶은 사진』 등 사진과 관련된 책은 다섯 권으로, 여느 사진작가들보다 많으며 자주 읽힌다. 오디오 칼럼니스트로서 펴낸 『소리의 황홀』은 오디오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여겨진다. 『생활명품 산책』, 『윤광준의 생활명품』, 『윤광준의 신생활명품』 등 실생활에 쓰이는 명품들의 가치를 조명한 책은 ‘생활명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마이웨이』에서는 가치 있는 인생을, 최근에 출간된 『심미안 수업』은 예술 전반의 아름다움을 통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실현가능한 ‘가치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봄꽃이 만개한 4월, 서울 망원동 카페 엔트러사이트에서 그를 만났다.
-<독서신문>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의 셀럽으로 선정되셨다. 독자들에게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린다.
<독서신문>, 굉장히 오래된 신문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도, 읽는 사람으로서도 책과 관련된 매체가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자발적 작가’입니다. 직장생활을 17년 정도 했고, 40이 되기 전에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작가가 됐습니다. 저는 동시에 두 개가 잘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작가가 되려고 하니, 하고 있는 일을 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회사 선배들을 보니 ‘10년 지나면 저 사람들처럼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끔찍했습니다. 회사를 나오게 된 계기는 사실 그 이유가 컸습니다.
퇴사한 그날로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 제 나름대로 제 말을 실천을 한 거죠. 이후 20년 가까이 대중에게 개인적 작업을 펼치는 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 글을 쓰는 작가가 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마당>에 사진기자로 입사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글도 쓰고, 영업 등 잡다한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체계적인 글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습니다. 회사에서 가르쳐줄 여건도 안됐죠. 정기간행물이다보니 중압감 속에서 어쨌든 뭘 써내야 했습니다. 첫 기사가 제 첫 글쓰기가 된거죠. 그 긴장과 스트레스를 나름대로 겪어냈고, 부족한 것을 알기에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글 쓰는 일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사진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답답합니다. 사진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할 때가 많아요. 이미지만으로 전달될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고, 사진의 한계를 글로 메웠죠. 반대로 글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기도 했죠. 그런데, 사진보다는 글이 더 재밌었어요. 그래서 아예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두문불출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인데요. ‘작가가 되려면 공간이 있어야지’하고 일단 작업실을 마련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김훈 선생과 작업실을 공유했는데요. 하룻밤 지나면 김훈 선생 옆에 산처럼 쌓인 지우개가루와 찢긴 원고지들, 그것이 빛을 받아 빛나던 모습, 김훈 선생이 작업하는 모습이 제 인생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어요. ‘글은 저렇게 쓰는 구나’, 한 마디로 선배의 글을 쓰는 이미지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요. 김훈은 연필이었지만, 저는 자판이었죠. 자판이 부러지나 제 손가락이 부러지나 경쟁하며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글들은 전부 오랜 연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잡지사를 다니며 한 체험들이 많았기에 글의 소재는 많았다는 건 행운이었죠. 첫 기고는 <월간 오디오>였고, 이후 각종 매체에 기고를 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사진,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패션, 요리… ‘美’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저를 전문가라고들 하지만 저는 저 스스로 전문가가 아님을 너무 잘 알아요. 단순히 뭘 한다고 전문가는 아닙니다. 전문가라는 명칭은 검증을 거치고, 전문가라는 사실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범위보다 많이 알면 전문가라고 하는데 그건 그저 말을 붙이는 것뿐입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전문가와 전문가가 아닌 사람 사이의 가교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면적으로 그 분야에 좀 더 깊게 관여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부분을 상대방에게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전문성과 비전문성 사이의 앵커정도로 봐야 하는 거죠.
그리고 저는 이러한 앵커 역할이 보통 사람의 영역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교양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문성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역이란 말이에요. 미술, 음악, 문학 등 모든 영역이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자기 삶 속에 끌어들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을 전문가로 불러버리는 것뿐이겠죠. 제가 하는 수준의 이야기들은 모든 사람이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보편적 교양의 범위인 것이죠. 무언가를 전문성이라고 부르는 순간 전문가에게 맡겨 버리니 교양이 안 되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지요.
-그럼에도, 어떻게 이렇게 넓은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관심과 호기심입니다. 관심과 호기심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한가’ 질문하고 싶습니다. 삶의 역동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 삶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듯 새로운 것이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은 머물러 있는 순간에 과거의 것이 되고 낡은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 기대가 없다면 관심도, 호기심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 삶에 기대가 있기 때문에 저의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알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관심과 호기심이 결국은 행동하게 합니다. 보고 싶은 장면이나 경치가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I wish’로 끝나지만 저는 직접 가서 보는 거죠.
또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한정된 ‘시간’이 저에게 크게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사는 건 재미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으로, 네이버를 꼽습니다. 무엇이든 검색해보고 다 안다고, 가졌다고 착각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호기심과 관심은 사라져버립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는 건 생각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저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삶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현장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직접 체험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와 업적은 엄청나고 세상은 너무나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님의 ‘미적인’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 요즘 하루는 어떤 모습인지 듣고 싶은데…
제 작업실에 17년째 그 자리에 있는 오디오가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고민합니다. 스위치를 켜, 말어. 그 망설임은, 일단 오디오에 전기를 넣는 순간 밥도 안 먹고 거의 하루 종일 빠져들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음악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서 감흥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 관계를 알아가는 것이 음악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8번을 듣게 됐습니다. 천 명이나 등장해 ‘천인 교향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8번 교향곡은 시끄럽고 정신없어서 과거에는 감상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말러가 이 교향곡을 작곡한 동기가 자기 아내의 불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감흥이 변했습니다. 말러의 노년에 아내가 바람을 폈는데, 아내와 바람이 난 남자가 말러와 담판을 지으러 말러를 찾아왔답니다. 그러자 말러는 아내를 앉혀놓고 ‘너 저놈한테 갈 거야, 나한테 올 거야’ 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이 교향곡을 헌정한 겁니다. 이런 맥락을 알고, 말러의 입장이 돼서 이 음악을 다시 듣게 되니 이 곡이 전혀 다른 감흥으로 다가왔습니다. 음악이 시끄러웠던 이유는 결국 제 상태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안 들렸던 거지요.
이렇게 17년 동안 그 자리에서 매일 듣는 음악 덕분에 제 감정의 상태나 마음은 매번 새롭습니다. 음악은 이렇게 저의 미적 기준이나 미적 자양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윤광준의 생활명품』과 『윤광준의 신생활명품』을 연재한 <중앙Sunday>를 오래전부터 구독했는데요. 이 잡지를 통해 서울에서 벌어지는 문화 소식들을 챙깁니다. 특히 미술 전시회 관련 정보들을 꼼꼼히 챙기는 편입니다. 보고 싶고 관심 있는 것들을 메모했다가 직접 가서 보지요. 그리고 미술관에 한 번 가게 되면 하루를 거기서 보냅니다. 저는 그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또, 지방에 어떤 새로운 공간, 건축이 생기거나 문화 이슈들이 있으면 그것을 꼭 메모를 하고 결국 그 근처에 가서 둘러봅니다. ‘머물지 않는’ 한 시대가, 삶의 축약이 그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큰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독서와 마찬가지입니다.
-심미안 수업에서 “예술의 영역에서도 객관적 판정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 객관적 판정의 수준을 높고 깊게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비교의 관점이 생기면, 재미가 생긴다”고 했다. 심미안이 시간과 경험에 따라 향상되는 능력이라면, 지금 작가님의 심미안은 꽤 고도화됐을 것 같다. 근래 작가님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이 궁금하다.
요즘에는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이 굉장히 좋아요. 건축, 디자인 같은 것 말이죠.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건축은 익숙하기도 하지만 낯선 것이기도 하죠. 우리가 감상으로서의 건축을 마주하게 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20년 전부터 외국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아졌어요. 여행들을 통해 외국의 건물이 얼마나 멋진지를 알게 됐어요. 특히 현대건축의 매력을 알게 된 다음부터 건축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단순히 인간이 사는 집으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그 형태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이상을 구현하는 과정과 다를 게 없습니다. 또한 시대에 따라 재료와 기술, 디자인이 달라지는 건축의 근 100년 동안의 변화는 그 이전 수천년 동안의 변화보다 훨씬 변화무쌍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고, 건축의 미(美)를 발견하는 일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특별히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건축이 재미있습니다. ‘왜 건축은 기둥이 꼭 안에 있어야 해?’ 이 건축가는 상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건물을 짓습니다. 또한 의뢰인의 요구를 ‘자기화’해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완성하죠. 이 건축가는 건축이 단순히 인간을 담는 그릇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 사람의 대표작 5개 중에 3개는 직접 가서 봤어요. 역시 대단하더군요.
-2002년 『생활명품 산책』 2008년 『윤광준의 생활명품』 2017년 『윤광준의 신생활명품』을 통해 ‘삶을 위한 좋은 물건’ ‘더 아름답고 편리한 물건’을 소개했다. ‘생활명품’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데, 최근 발견한 ‘생활명품’ 이야기도 듣고 싶다.
최근에 발견한 생활명품은 ‘루미오’라고 하는 전등입니다. 책처럼 펼쳐지는 등인데요. 벌써 짝퉁이 돌아다니더군요. 조잡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루미오’를 설계한 사람은 인도네시아의 한 디자이너인데요. 인간의 삶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를 제대로 짚은 느낌입니다. 밤이 되면 사람은 불을 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불은 켜게 되는데요. 우리는 이때 너무 밝은 등을 켤 수도 없고 끌 수도 없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걸 켜자니 눈이 부실 것 같고, 끄자니 깜깜해서 괴롭고. 마치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를 해소해주는 제품입니다. 세상에는 극단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데, 찾아보면 별로 없습니다. ‘루미오’의 디자이너는 이 차이를 유심히 본 것 같아요. 딱딱한 사각이 아닌, 마치 저 멀리 무지개가 펼쳐진 듯한 디자인도 명품입니다.
그런데 제가 소개한 생활명품 중에는 가격이 꽤 비싼 것들이 있고, 비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싸고 싸고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한테 필요한가 아닌가의 문제지요. 이 정도의 가치가 필요하고, 다른 것을 줄여서라도 사고 싶은 상태가 중요하다고 봐요. 철학적일 수 있는데요. 인간은 상대적 가치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때로 절대적 가치에 놓여있어야 충족되고, 진보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는 겁니다. ‘너무 비싸요’ ‘너무 어려워요’ ‘그만 하면 충분해요’라는 한 마디가 자신과 모두를 일반화시켜버리고, 평준화시켜버립니다. 모두가 뻔한 이야기만 하게 되고, 더 이상의 이상은 추구할 수 없게 해버리지요.
-청년들은 취업이 안 되고, 생존에 급급한 국민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아름다움을 찾기엔 조금 각박한 시대인 듯싶다. 누군가 ‘아름다움, 찾아봐야 뭘 하겠느냐’라고 말한다면 어떤 대답을 해주겠나?
공허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갑갑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적 아름다움을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세요. 현실도 중요하지만, 현실만 갖고 해결되지 않는 게 인간의 삶입니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더 큰 동력은 현실 밖의 이상이에요. 현실과 이상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우리의 삶이 객관적으로 평형을 이루는 거잖아요. 뭐든지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삶이 고단해도 예술적 관심을 펼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건 마치 사람이 꿈꾸지 않으면 자기의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상이 영영 자신한테 올 확률은 없어지는 거죠. 인간의 삶은 비교와 선택을 통해 단단해지는데 그 비교의 기준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2011년 『마이웨이』에서 “오늘,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젠 뻔뻔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관심사에 몰두한다 해도 누가 뭐라 하지 못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답했다. 답답한 삶에 사이다 같은 책이었는데… 8년의 세월이 흘렀다. 누군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다시 묻는다면…
어찌됐든 인생은 한 번 사는 거예요. 사는 게 하나도 철학적이지 않다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으며, 내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으로 질문하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한 번도 그것을 생각해 볼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제가 본 많은 사람들이 그저 허겁지겁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그냥 살다가 죽더라고요. 대한민국 사람들 삶의 속이 이렇게 비어있는지 몰랐었어요. 너무나 열심히 살긴 하는데 근원적 질문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거니?’라는 근원적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질문에 ‘나답게 살래요. 주체적 삶을 살래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한 번 사는 거니까요. 물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려면 자기 삶에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세상을 두려움과 그 두려움의 극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이런 관점이 생기지 않아요. 세상의 기준을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감을 가지면 나로부터 비롯되는 세상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어요.
-좋은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출간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추천합니다. 다빈치 평전입니다. 월터 아이작슨은 스티브 잡스 전기도 쓴 사람인데요. 이 책에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현재의 인물처럼 묘사합니다. 엄청난 취재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서술의 생생함이 기가 막힙니다. 특히 다빈치의 전방위적이고 다채로운 관심을 굉장히 입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었어요. 스티브 잡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특징도 끝없이 머물러있지 않고 자신의 관심을 향해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둘을 꿰뚫는 키워드도 ‘호기심’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