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소설가 김성동 “사형당한 핏빛 역사를 바로잡아야 해요”
[책 읽는 대한민국] 소설가 김성동 “사형당한 핏빛 역사를 바로잡아야 해요”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03.25 15: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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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소설가 김성동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만났다. [사진= 오재우 기자]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우리 근현대사가 민중의 피로 얼룩진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오르면, 우리나라가 진정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에는 일제와 청, 러시아, 미국 등 이권침탈을 노리는 열강과 이들을 등에 업고 권좌를 차지하려는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대립이 있었고, 해방 후 미국과 일본, 중국과 소비에트 그리고 이들을 등에 업은 정치인들의 이념 대립이 있었다. 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은 피지배층 민중들이었다. 외세에 휘둘리는 위선적인 지배층에 대항해 개혁을 내세운 갑오년 농민군(동학농민군)이 들고일어났고, 해방 후에는 여순민중항쟁, 제주4.3민중항쟁, 5.18광주민중항쟁 등이 터져 나왔지만 결과는 동족 학살이었다.  

소설가 김성동은 독립하지 못한 민족의 핏빛 역사를 3대째 이어오고 있는 인물이다. 성균진사였던 증조부 김창규(본래 김창균이었으나 집안 사람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이후 안동김씨 문중에서 돌림자를 규로 바꾼다 )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피탈 당하자 자살을 시도했고, 경술국치 때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난다. 해방 후 조부는 인공치하에서 토지분배 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대공과 형사들에게 고초를 당했으며, 모친은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십여 년 징역을 살았다. 부친 김봉한은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대부 박헌영의 비선으로 활동하는 등의 죄로 한국전쟁 당시 수천명의 좌익사범들과 함께 사살 당한다. 김성동 자신은 연좌제로 인해 이른바 ‘3불(不)의 덫’에 걸린다. 공무원도, 장교도, 고등고시를 통한 임관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고3 때 학업을 중단하고 불가(佛家)로 향한 이유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찾아온 대공 형사가 살쾡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붉은 씨앗이로군”이라고 했던 말이 그를 소설가로 키운 평생의 화두였다고 한다.       

“예전 어른들은 역사를 볼 수 있는 이만을 가리켜 사람(史覽)이라고 불렀다.” 김성동이 소설 『국수』(1991년에 <문화일보> 연재 시작 2018년에 27년 만에 마무리 )에서 쓴 바처럼 작가는 사람(史覽)으로서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는 민족의 역사를 끄집어내 직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이 ‘다큐’라고 말하는 그에게 민족의 역사는 곧 자신의 역사다. 베스트셀러 『만다라』(1978 )에서는 종교를 통해, 『현대사 아리랑: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2010 )에서는 역사가들이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통해, 『풍적』(1983 )에서는 속절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지난해 그 마침표를 찍은 국수에서는 임오군란(1882 )에서부터 갑오민중항쟁(1894, 김성동은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했다. 동학도만이 참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전의 민중들의 삶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돌려 말했다.  

김성동은 침략당하기 전 민족문화를 서슬 퍼런 눈으로 지키고 있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운명’ ‘연구’ ‘조예’ ‘지식’ ‘지도자’ ‘외세’는 일본말이다. 각각 ‘살매’ ‘갈닦음’ ‘공부속’ ‘알음알이’ ‘목대잡이’ ‘외간 것’이 우리말이다. ‘우리말 보물창고’라고 불리는 『국수』에 『국수사전』을 마련했듯, 『외로워야 한다』에서는 ‘토박이말 모음’을, 『현대사 아리랑: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에서는 ‘말 풀이’ 항을 만들었으며 책마다 우리말과 그 뜻풀이를 담았다.     

2년 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옮긴 거처라는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승정원일기 등 역사책이 빼곡하고 붓글씨와 석불(石佛) 같은 유물이 있어 집이 아닌 서재, 혹은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소설가 김성동 [사진= 오재우 기자]

-<독서신문>의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명사로 선정되셨다. 독자들에게 인사 부탁드린다. 

안녕하십니까. 80년대 초 <독서신문>에 원주 민주화 운동 선봉장이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 관한 글을 기고한 것이 기억납니다. <독서신문>은 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오로지 물질만 중시하는 사회에서 정신을 중시하자는 취지에서 탄생한 매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기구독은 아니지만 가끔 봤습니다. 80년대에 잠시 끊겼다가 다시 나온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참 좋은 매체였는데’ 하고 당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현재를 ‘정신의 대공황 시대’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독서신문>이 지도와 나침반을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독립하지 못한’ 국가에서 설움을 겪으셨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3.1운동은 대구10월항쟁과 여순민중항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항쟁입니다.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민중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다는 한계가 조금 아쉽지요. 반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은 기념하기가 조금 주저됩니다. 일제강점기 진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역사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알지는 못합니다. 진짜 역사를 안다면, 기념일들을 마냥 기념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있고, 일제와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제국주의 양키(미국을 비하하는 말)와 ‘머리 검은 미국인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갑오민중항쟁(동학농민운동)에서 진짜 주인공은 전봉준이 아니라 김개남 장군입니다. 전봉준은 김개남 장군보다 두 살 어린 수하였을 뿐입니다. 당시 민중 수십만명이 따랐던 김개남 장군을 일제는 고문 및 살해하고 역사에서 지워버리고자 했습니다. 김개남 장군과 그를 따르는 민중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던 전봉준을 내세운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절에 있을 때 들었습니다. 당시 갑오민중항쟁에 참여했던 90세가 넘은 노승들이 직접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분들은 항쟁으로 인해 팔다리가 없거나 눈이 한쪽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인이나 학자, 그 누구도 이들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이 게을렀기에 일제에 의해 작성된 재판 기록을 그대로 받아 적었고, 이로 인해 지금 대중들이 잘못된 역사를 지금까지 그대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 왜곡된 역사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의하지 않은 개혁을 왜 갑오경장이라고 부릅니까. 정확한 표현은 갑오왜란입니다. 이외에도 일제가 집요하게 파괴한 우리 문화는 너무나 많습니다. 소위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는데 우리 역사는 승자에 의해 갈가리 찢겼습니다. 남북 모두 여기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남쪽에서 친일 세력은 청산되지 못했고, 친일파를 피해 올라간 우리 민족의 보석 같은 사람들은 북에서 숙청을 당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표현이 있다. 진실을 이야기하며 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려운 삶을 사셨다고 들었다. 

어느 사회에도 순응해서 살라는 지배계급의 논리가 있고,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습니다. 양자가 항상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사회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말로도 달리 정의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저항이고 비판입니다. 작가는 ‘영원히 씹는 자’입니다. 좋은 세상이 왔다고 만세 부르는 자는 작가가 아닙니다. 극락세계가 오기 전까지는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끝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나 작가나 그 정신이 상통합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고난은 따라옵니다. 5.18광주민주항쟁 직후 소설 『풍적』에서 지주가 9를 먹고 소작농이 1을 먹는 토지 문제를 비판하며 ‘조선공산당 정강 정책’(소작농 3, 지주 7의 비율 )을 담으려 했다는 이유로 <문예중앙>에서 연재가 중단됐습니다. 당시 소설을 연재하면 <문예중앙>만이 아니라 <중앙일보> 그리고 그 모체인 삼성까지 날아갈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사항을 다 빼고 소설을 실었는데 그건 발톱과 이빨이 다 빠진 소설이었습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소설 만다라로 촉망받는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지만, 문예지뿐만 아니라 회사 사보, 일간지 등에서 원고 청탁이 전부 끊겼습니다. 당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중앙일보>에 바둑 관전평을 2년간 연재하게 되면서 조금 먹고살게 됐지요. 바둑은 이데올로기가 없으니까요. 이외에도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다시 <중앙일보>에 소설 『그들의 벌판』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학생 운동을 묘사한 소설이었습니다. 그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모 대기자가 ‘김 선생, 고등학생들 요즘 그렇게 안 놀아요’라고 말했어요.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죠. 53회 만에 연재가 중단된 것은 당시 신문에 연재하는 작품 중 ‘기록’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정말 모든 곳에서 연재가 끊겨 몇 달 동안 다시 말 그대로 죽을 뻔했습니다. 그 후 <문화일보>에서 1991년 연재를 시작한 게 『국수』입니다. 논쟁거리이던 현대사를 거스르고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벌어지던 갑오민중항쟁 직전 시절을 다루게 된 거죠. 그런데 『국수』를 쓰기 위해 사전 조사하면서 150년 전 과거와 지금이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세에 휘둘린 지배계급의 욕심과 싸움에 민중들이 휘둘리고 고통받는 현실 말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일입니다. 

-2010년 사회주의 혁명가·독립운동가들의 인생 역정을 복원한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을 출간하셨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독립운동가로서 대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일각에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서훈(상훈법에 의거해 대한민국이나 우방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자에게 훈장과 포장을 수여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게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는데 해방 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기용된 친일 고위 경찰 노덕술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가 월북한 이유입니다. 심지어 김원봉은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지도 않습니다. 그는 중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해방 후 친일세력이 자리 잡은 남한에 일제강점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와 개혁가들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저에게 “다 북으로 올라가 버리고 남에는 쓰레기만 남았다”라고 했듯 우리는 아직 친일파 청산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북쪽 역시 김원봉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재능 있는 혁명가들을 숙청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양쪽 모두 인간의 ‘열성 인자’가 발현된 것이지요.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냐고, 이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좌’가 제대로 다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이제라도 ‘좌’를 다루는 건 필요한 일입니다. 유럽에는 사회주의국가들이 많은데 왜 대한민국은 사회주의라는 말에 무턱대고 반감을 품을까요? 그 이유가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요? 제가 70세가 넘었습니다. 저는 30대에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두 배는 더 살았으며, 잡혀가서 고초를 당하든, 죽든 하는 게 두렵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직접적으로 바른말을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김성동 [사진= 오재우 기자]

-남북관계가 급진전했다. 통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미리 얘기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통일’은 일본말이고 ‘일통’이 우리말입니다. 이렇게 일제는 우리 언어와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있습니다. 

일통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분단된 이유가 우리 자신의 의지 때문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분단된 역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통은 잘못된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며, 따라서 지상 명제입니다. 

북한을 그렇게 미워하지 말라고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북한 핵 문제를 말할 때 ‘강도론’을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강도가 집안에 쳐들어왔는데 그 강도가 핵을 들고 있다고 합시다. 그 강도와 맞서려면 핵을 가져야 합니다. 북한은 생존을 위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일통은 연방제 일통이 현실적일 것입니다. 일통이 돼서도 문제입니다. 실질적인 일통이 되려면 떨어져 있는 시간의 3배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50년 떨어져 있었으니 150년은 흘러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수’에 쓰신 언어들이, 침략당하기 전 우리말이어서 그런지, 솔직히 읽어나가기가 어려웠다. 한편으론 우리말을 쉽게 읽지 못하는 게 부끄러웠다.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라는 말처럼 조상들의 세계와 단절된 느낌이었는데…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언어는 계급의 산물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는 계급이 네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민계급과 중간계급이자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중인계급 언어는 지금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아예 보존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제가 국수를 통해 살리고자 했던 언어들은 사라져버린 언어 중 극히 일부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한의 국어학자들과 북한의 국어학자들, 문학평론가들, 교수, 박사 모두 범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다룬 조선어학회, 여기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희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이름이 박힌 국어사전에 일본말이 그대로 녹아 있는데도 여태 모두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남에서든 북에서든 그나마 가장 괜찮은 사전이니 비판 없이 사용한 것입니다.    

평론가들도 그렇고 독자들도 그렇고 제가 소설에 쓴 우리말이 어렵다는 말이 많습니다. 책에서 다루는 철학이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말이 어렵다’는 겁니다. 출판사 대표들도 독자에게 맞춰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려우니까 독자에게 맞춰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는 자가 우리말을 모른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진짜 문화, 우리 언어가 아버지 할아버지 시대 때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라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를 기억하고 우리 진짜 언어와 문화를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말을 고집하는 것은 저의 고집이나 취미가 아닙니다. 제가 하는 작업이, 우리가 왜놈들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는 일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한 독서는 읽는 자를 괴롭히는 겁니다. 술술 넘어가는 책은 책이 아닙니다. 그런 책은 덮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오락거리일 뿐입니다.   

-소위 구도(求道)의 작가로 불린다. 남아있는 시간, 무엇을 더 구하고 싶으신지...

1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주기에 제망모가(祭亡母家) 소설 『멧새 한 마리』(솔출판사 <문학의 오늘> 2019년 봄호에 실림 )를 어머니께 바쳤습니다(김성동은 2016년 <황해문학>에 제망부가로 소설 『고추잠자리』를 발표한 바 있다 ). 그러고 나니 지금은 힘이 빠지고 기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쉬고 싶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총론을 썼다면,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각론을 단편으로 쓰고 싶습니다. 지금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환하던 서신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써보고자 합니다. 

여성운동사도 재조명하고 싶습니다. 여성운동은 지금이 과거보다 훨씬 퇴보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위원장으로 계시던 여맹(민주여성동맹)에서 여성운동사에 관한 논문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좋은 책 몇 권 추천 부탁드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고난의 시절 독서만이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그래서 책에 더 파고들었습니다. 역사학자 김상구의 『김구 청문회』와 장면 전 국무총리의 넷째 아들이 쓴 『미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성찰』을 추천합니다.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기록 중심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책입니다. 역사학자 김진경의 『조선 600년간의 비밀 요동과 부여』, 그리고 역사학자 이덕일의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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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2019-04-14 17:45:22
상해는 세계인들이 모두 모인 도시라 일본인들에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이라 안전을 위한 공식적인 임시 정부가 있었고, 만주에는 비밀리에군인들이 훈련을 하거나 일본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던 곳이었고, 두 곳은 늘 서로 연계돼서 활동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모두 동의하지만 임시정부 건국일을 우리 건국기념일로 삼는걸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일제 강점 후에 우리의 자주됨을 처음으로 선언한 날이므로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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