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호미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03.1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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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한학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소위 신식 교육과 한학문(漢學文)을 익힌 외할머니다. 음식 및 바느질 솜씨가 야물고 묵서와 난도 잘 치곤 했다. 어렸을 때 외가에 가면 할머니는 모시 저고리를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먹을 갈아 한지에 난을 치곤 했다.

경주김씨 집성촌의 대 종손 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할머니다. 근동에 있는 넓은 들이 전부 외가 농토일 만큼 부농의 며느리였다. 열아홉 살에 시집와 층층시하에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여간해서 태도 한번 흐트러짐 없었던 강직하고 철두철미한 성미를 지닌 분이었다.

반면 외할아버지는 날만 새면 우마차에 쌀, 참깨, 콩 등의 곡물들을 잔뜩 싣고 읍내 기생집을 드나들기 예사였다. 심지어 노름까지 손대어 집안이 날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축 나는 가세를 마냥 지켜볼 수만 없었던 터,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 외할아버지 대신 억척스레 일을 했단다. 바쁜 농사철엔 젖먹이를 밭둑에 눕혀놓고, 땀범벅이 된 무명적삼을 짜서 입어가며 삼복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을 매어 밭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젊은 날 이런 뼈저린 삶의 고통을 겪은 탓인지 생전 외할머니는 잠시도 당신 몸을 그냥 두지 않았다. 어린 날 우리 집에 오면 텃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곤 했다.

그러던 외할머니께서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소식이 외삼촌으로부터 들려왔다. 이십여 년 전 일이다. 그때는 삐삐가 있던 시절이다. 외삼촌이 삐삐만 사놓으면 감쪽같이 없어진다고 했다. 삐삐뿐이 아니었다. 호미는 사놓기만 하면 사라진다고 했다. 

그때는 그러한 외삼촌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외할머니께서 구십 삼 세로 세상을 떴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외숙모가 전화를 줬다. 할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할머니께서 덮고 있던 이불 홑청을 뜯어보니 그 속에서 호미가 두 자루, 곰팡이 핀 빵, 그리고 세 개의 삐삐가 나오더란다. 특히 호미는 새것으로써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만 숨겨두었다고 했다.

돌이켜 보니 외할머니의 이상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외가 뒤뜰에 앵두가 뻘갛게 익으면 외할머니는 그 앵두나무에 물을 주고 풀도 없는데 또 김을 매곤 했었다. 처음엔 그런 할머니 행동이 워낙 부지런한 성품이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일을 하는 줄로만 여겼다.

그 이후 할머니는 치매증세가 더욱 심하여 잠을 잘 때도 호미를 가슴에 품고 잠들곤 했다. 품 안에 든 호미를 살며시 빼앗기라도 할양이면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울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집안에 놋그릇이며 세간들을 집 변소에 다 갖다 버리기도 했단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호미만큼은 항상 가슴에 끌어안고 지낸 외할머니라고 했다. 

생전 집안의 호미를 보자기에 몽땅 싸 가슴에 품으며 그것을 갖고 시집갈 거라고 시집 보내 달라고 외숙모께 떼를 썼다고 하였다. 우리가 외가에 갈 때도 외할머니는 보자기에 호미를 싸안고 외할아버지 곁으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을 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외할머니의 지난날 땀과 한이 서린 호미는 예로부터 농촌에서 농부들의 일손을 덜어주던 농기구 중에 일등 공신이었다. 호미는 땅을 일굴 때 곡식의 뿌리에 산소를 잘 공급해주도록 만들어진 멋진 구성을 이루고 있는 농기구다. 이게 전부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아이디어이자 과학적인 창출이 아니고 무엇이랴. 무엇보다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쇠가 이렇듯 인류 생존의 원천이라고 할 식량 생산에 필요한 농기구로 거듭나서 농사일에 이용된다는 사실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요즘은 제초제의 등장으로 호미가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외국에서 오히려 호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농기구인 호미의 효용성을 외국인들이 인정한다니 기쁜 일이다. 

나는 최근 시골 장터에서 호미 한 자루를 구입했다. 딱히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이다. 거실에 앉아서 막 사 온 호미를 만져 본다. 불현듯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순간 눈가에 물기가 솟는다. 하늘나라의 외할머니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까? 아마 당신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끼던 호미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엔 흰 수건을 쓴 채 호미로 밭을 매던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내가 들고 있는 호미 위로 자꾸만 오버랩 돼 할머니가 마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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