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올해는 ‘페미니즘의 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점에서 페미니즘 서적의 인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페미니즘 서적에는 하나같이 ‘여성혐오’나 여성을 노린 범죄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최근 과천 토막살인사건과 헤어진 여자 친구를 닮았다며 고등학생을 둔기로 내리친 사건 등 잔혹범죄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 공포감은 더 커진다. 한 여성은 “여성들은 페미니즘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갈급하다”며 “말 그대로 여성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각 서점에는 책 『여성범죄 전담 형사가 들려주는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 깔렸다. 출간 직후 많은 여성이 관심을 가졌고, 지난 19일에도 17시경 종각 영풍문고에는 한 시간 동안 30여명의 여성들이 통로를 지나며 해당 서적을 뒤적였다. 지금까지 오윤성 작가의 『범죄는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자체를 다룬 서적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여성이 범죄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실용적으로 설명한 책은 없었다. 책을 구매한 한 여성은 “워낙 여성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 이 책을 사서 여성을 노리는 범죄에 대처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여성은 “다른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보면 지금까지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밖에 생각이 안 된다”라며 “우리나라 여성들은 꼭 참고해야 할 실용서적”이라고 말했다.
책은 1장에서 범죄 상황에서 필요한 용기와 자신감을 키우고, 두려움을 없애는 법을 설명하고, 2장에서는 길거리, 공중화장실, 클럽, 주차장, 혼자 있는 집, 택시 등에서 범죄자를 마주치는 상황과 그 대처법을 소개한다. 3장에서는 바바리맨, 지하철 치한, 스토커, 데이트폭력범 등 범죄자를 유형별로 소개하고 그 대처법을 정리한다. 4장에는 반드시 알아야 할 기초적인 호신술이, 5장에는 피해를 당했을 때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법 등 사후 대처법이 담겨있다. 일부 여성들이 이 책을 ‘실용서적’이라 칭하는 이유는 목차에서처럼 여성을 노린 범죄가 여성의 집에서 일어날 정도로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연인으로부터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가해자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13년 차 여성 경찰인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여성혐오’ 범죄라고 알려진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강남역 사건 이후 2년이 지났지만, 여성이 피해자인 강력범죄(살인·성폭력)는 오히려 2016년 2만7,431건에서 지난해 3만270건으로 10% 증가했다. 지난 17일 헤어진 여자친구를 닮았다는 이유로 한밤중 귀가하던 여고생을 둔기로 폭행한 사건도 여성혐오 범죄라 할 수 있다. 유독 여성을 노린 강력범죄는 급격하게 증가해왔다. 2015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1995년 6,479건이었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강도·강간·방화 등의 범죄는 2014년에는 28,920건으로 급증했다. 이는 남성을 노린 동일 범죄가 1995년 2,597건에서 2014년 3,552건으로 다소 증가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범죄자의 타깃이 되는 나라는 흔치 않다. UN마약범죄사무소(UNODC)의 2014년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국 살인사건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52.5%였다. 이는 2008년 51.0%에 비해 증가한 수치이기도 하며, 미국(22,2%), 영국(22.2%), 캐나다(30.2%)와 비교할 때 높은 수치다. 문화심리학자 한민은 그의 책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에서 “이런 결과는 한국에서 남성들이 어떠한 조건이 되면 여성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확률이 다른 나라보다 크다는 것”이라며 “한국 문화의 어떤 점이 한국 남성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기 쉽게끔 ‘패턴화’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분명 한국 문화는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쉬운 문화”라고 덧붙였다.
정부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줄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지난 5월 ‘혜화역 시위’를 시작으로 수차례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18일 종로구에서 ‘#미투운동과 함께 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 내자’라는 시위에는 주로 여성인 시민 2만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은 국민이 아니냐. 사람이 먼저라는 이 정부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니냐”며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이냐”라고 비판했다.
결국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여성들이 많아진 듯하다. 인터넷에 호신용품을 치면 전기충격기, 가스총, 호신용 스프레이 등 다양한 물품과 판매처가 나올 정도다. 책 『여성범죄 전담 형사가 들려주는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의 저자는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며 “동물의 세계에선 암컷들이 수컷보다 더 투지가 넘치고 용감해. 인간 세상과는 반대로 말이지. 어쩌면 여자들도 저 암사자처럼 남자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을 “여성들의 잠재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강하고 멋진 여전사의 기질을 찾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여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지금, 어쩌면 이 책은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