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주부의 날들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주부의 날들
  • 스미레
  • 승인 2018.06.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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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산 중턱에 앉은 집에 여름이 왔다. 창문을 열면 성큼 자란 숲이 일렁이며 우수수 별 터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얼굴에는 눈부신 햇살이 빛나고 속눈썹에는 초여름의 순수가 앉았다. 저녁이면 나뭇잎 그림자가 넘실대고 마당의 나리는 부지런히 꽃대를 올린다. 숲 속에 사는 이는 이토록 손쉽게 계절을 탄다. 작은 마음이 봄에는 수런대고 가을이면 가라앉는다. 여름에는 달뜬다. 그동안 세심히 골라 고이 묵혀두었던 무언가를 꺼내기 좋은 때다. 주로 책이나 음반, 취향과 관련된 것들. 그리고 그것에 기꺼이 사로잡혀 여름내 꼼짝을 않는다. 올 유월 역시 그렇다.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마냥 즐겁고 활발하고 천진한 날들이다. 

눈 닿는 곳이 온통 숲이다. 너무 여리지도, 너무 뻣뻣하지도 않은 유월의 잎새가 나의 이십대를 불러낸다. 노트 위에 무언가를 쓰려다가도 '세상은 너무 낡았고 모든 것은 쓰여졌다.'는 랭보의 말에 무기력해지던 날들. 어린 문학도는 천재 시인의 한탄에 공연히 숙연해져 무엇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노트를 덮고 주부가 되었다.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운다. 여전히 티미하다. 꿈 앞에 망설인다. 그것을 신중함으로 가장하며 산다. 돈은 못 모아도 그릇은 모은다. 야망 대신 아이를 키우고 시 대신 밥을 짓는다. 그러다 생각한다. 세상은 아직 새롭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반찬거리를 헤아리고 빨래를 분류하는 매일이 어제와는 또 다르다고. 내 아이가 자라는 소리에 지축이 흔들린다고. 나의 하루는 아직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다고. 가계부는 안 쓰지만 일기는 쓰는 아줌마가 랭보에게, 그렇게 말한다. 

랭보와 살림 사이, 몇 광년의 거리를 불과 몇 년만에 달려왔다. 한때 아이콘이라 여겼던 랭보의 존재는 어느새 희미해졌다. 대신, 출가한 아들을 기다리며 시골집에서 묵묵히 살림을 했을 그의 어머니를 그려본다. 회사와 집, 시댁을 바삐 오가며 딸들을 키웠을 나의 엄마를 떠올린다. 주부의 삶은 시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완벽한 무정형 속에서 매순간 무언가를 느끼고 매만지고 펼쳐낸다. 다만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살림의 사전적 정의는 '한 집안을 일으켜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살리다'는 뜻의 '살림'에 더 무게를 둔다. 

주부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손끝의 정성과 음식으로 가족을 살리우며 때로는 풀 한포기, 꽃 한송이도 살려내지 않는가. 각 가정의 주부에 의해 살아나는 이 심상한 풍경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기적이다. 매일의 분초 사이마다 주부의 온기가 스며들어 그 날의 결이 바뀐다. 

엇비슷한 매일이지만 주부는 오늘도 무언가를 살려낸다. 살림은 돌고 돌지만 살림하는 여자의 마음은 매일 새롭다. 말 못할 감정이 무수히 피고 진다. 매일 다짐하고 매일 포기한다. 세상은 낡았고 모든 것은 쓰였다는 괴로움에 절필한 천재 시인이 주부로 살아보지 못 했음이 유감이다.

시인도 무엇도 되지 못한 나는 여기서 살림을 한다. 랭보의 말은 허울 좋은 핑계였다. 그 뒤에 숨어 얕은 능력을 어찌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 말이 나를 이리로 데려왔는지도 모르겠다. 

한여름이 코 밑이다. 오디로 스무디를 만들고 매실로 장아찌를 담근다. 집 안의 천들을 린넨으로 바꾸니 살갗에 닿는 공기가 한결 가볍다. 아이는 하루도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와락와락 자란다. 조용하고 분주한 날들이다. 특별한 것은 무엇도 없는 날. 하지만 내 방식대로 잘 살고 있기에 기특한 날. 작은 것에 유난히 감사한 날. 그런 날, 주부의 세상은 새롭고 오늘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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