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늦가을 빈 들판, 흙에서 배운다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늦가을 빈 들판, 흙에서 배운다
  • 독서신문
  • 승인 2016.12.0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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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R 몽고메리 지음 『흙』을 읽고
김혜식 수필가 <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가을 햇살을 머금으며 벼이삭이 고개를 숙인 게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사이 들녘은 빈 가슴이다. 마지막 가을 햇살을 받고 있는 들녘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내가 지은 일 년 농사인 문학적 질량을 셈하게 된다. 몇 섬이나 될까? 아무래도 땅이 우리들에게 돌려준 수확에 비하면 어림도 없을 듯하다.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 꽤나 넓은 호수가 있다. 그 호숫가를 긴 시간 거닐었다. 누가 보면 하릴없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 때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니는 물오리들의 모습이 유유자적이다.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마치 아이스 링크에서 쇼를 하는 것 같다. 인간들도 저 오리떼 십분의 일만 질서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들이 부지기수 아닌가.
 
어쨌거나 호수 길을 걸으며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레탄으로 뒤덮인 둘레길은 말끔히 단장되어 있어 걸을 때 먼지가 일지 않는다. 한편 흙의 기운을 받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밭뙈기들, 수변(水邊)으로부터 조금은 떨어져 있었으면 좋으련만 호수 가까이 있는 게 못내 아쉽다.
 
공유지의 주인은 언제나 부지런한 농부의 몫이다. 여름내 무성히 자라던 상추, 고추, 고구마 등속 밭작물은 보는 이의 마음을 한결 풍성하게 만들곤 하였다. 이왕이면 농약뿌리지 말고, 이것들이 제 흙 먹고 자라도록 놔두었으면 좋겠다. 그래야지만 청정호수를 두고두고 볼 수 있다. 악취가 풍기는 호수 생각만 해도 왠지 가슴 섬뜩해진다.
 
가을걷이 끝난 호숫가 수변 풍경이 참으로 볼썽사납다. 널브러진 검정색비닐, 뒹구는 농약병, 바람에 날리는 수많은 비닐봉지, 헌 옷가지 등, 이 모두는 우리들이 버린 것들이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한 권의 책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데이비드 R 몽고메리의『흙』이라는 책 내용이 그것이다.『종의 기원』을 쓴 찰스다윈은 1882년 숨을 거두기 직전『지렁이 활동에 대한 옥토의 형성』이라는 마지막 저서를 남겼다. 몽고메리는 흙을 예찬했고, 찰스다윈은 지렁이가 사람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그는 땅을 쟁기질하는 지렁이 창자가 농토를 옥토로 만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농부는 지렁이 밖에 없다고 극찬했다.

지렁이는 유기물은 말할 것도 없고, 돌까지 소화해낸단다. 그 덕에 100년~200년에 2.5센티미터의 옥토가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역사의 공통점은 기름진 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기름진 평야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그로인해 인구가 증가하며 구릉이나 삼림지대로 농경지가 확대되어 대규모의 집약지 농업을 이룬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무모한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흙의 존재를 불식하고 무관심하는 사이 흙 고갈과 침식으로 그 문명은 끝내 몰락을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원 전 3천년 경 고대 수메르 문명부터 그리스·로마 문명, 고대 중국과 마야 문명, 그리고 아마존강 유역의 토양 파괴를 예로 들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이 흙의 침식과 토질 악화를 주요 원인이라고 목소릴 높인다.

이는 노예 노동에 기반한 초대형 농장 확대와 100년에 평균 2-10센티미터의 토양 침식이 대규모로 일어났기 때문이란다. 이에 따라 땅의 건강까지 악화되면서 100만 시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한 해 20만 톤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 압박이 끝내는 제국을 쇠락시키는 부채질을 했다는 것이다.
 
흙이 고갈되고 침식되면 인간의 삶도 위협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다못해 미물인 지렁이도 흙을 자신의 창자로 쟁기질하는데 반해 우리 인간들은 어머니 자궁과 같은 흙에 대해선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온갖 곡식과 채소, 과일이 모두 흙의 작품이 아닌가.

농경지 학대는 시간을 다투듯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고 나면 멀쩡한 산하(山河)를 까뭉개고, 자고 나면 벽돌 두엄으로 변한다. 인구는 줄어든다는 통계인데, 건축은 우후죽순 격이다. 얼마 있지 않아 주인 없이 비워 둘 집들이 많을 터이다.

1천 5백 년 전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을 들판에서 보는 것 같이 기분이 씁쓸하다. 한여름 지옥염천에도 인간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느라 자신의 몸통을 깡그리 내어준 들녘이다. 씨앗을 품고 싹을 틔우고 성장을 도우며 결실을 남기고도 스스로는 침묵한다. 그리고 겨울을 버틴다. 인내와 겸손을 흙에서 새삼 배운다.

인류문명의 영원을 약속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흙이다. 이 흙을 영구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유기농법이다. 흙이 살아야 숲이 살고, 숲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 내가 살고 있는 근처의 아담한 호수, 우리들은 이 저수지만이라도 지켜내자. 자연의 모태는 흙이다. 과학의 힘은 무한이라고 하지만, 과학이 흙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제라도 우리들은 흙의 고마움과 흙이 부재(不在)하고는 인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데이비드 R 몽고메리의 『흙』이 어쩌면 인류 ‘제2의 성서’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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