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와 플로베르의 생가를 찾아서
빅토르 위고와 플로베르의 생가를 찾아서
  • 이재인
  • 승인 2007.11.23 1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리문학기행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
청년시절 유명 작가나 시인의 글을 즐겨 읽었다. 더욱이 외국 작가의 작품은 그것이 재미가 있든지 없던지 상관없이 교양으로 부지런히 읽고 그 작품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것이 크든 작든지 나로서는 그 감동이 작가의 존경으로 바로 이어지게 했다.

내 나이가 적지 않은 노년인데도 지금도 플로베르, 모파상, 위고, 사르트르, 까뮤 등의 이름이 열거되면 젊은 시절 그들의 작품을 흠모했던 독자로서의 감흥이 되살아난다. 그 감흥은 노쇠한 세포까지 되살리려는 마술을 부리게 한다.

▲ 빅토르 위고가 살던 아파트와 집무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독서신문
이번 프랑스 파리에서의 문학관 기행은 들뜬 나의 감정을 억누를 브레이크가 없었다. 『다빈치 코드』의 주 배경이 된 루브르 박물관, 그 얼마나 기다렸던 곳인가? 20대 나이에 프랑스의 사상과 예술을 흠모하던 나에게 꿈같은 현실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노틀담의 꼽추」의 저자 빅토르 위고의 생가를 순례 한다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 경외로 전환되었다. 그의 체온과 열정과 삶이 묻어 있는 생가방문은 분명 축복의 선물이었다. 더욱이 가까이 자리 잡은 볼테르, 에밀 졸라, 퀴리 부인이 잠든 묘지를 소리죽여 찾는다는 이 사실은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 같이 경건,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유명한 위인들이 묻혀 있으므로 명물로 변한 판테온. 무덤조차 위인들은 명소로 바꾼다는 사실은 이곳까지 스며들은 불평등이었다. 필자가 빅토르 위고의 기념관 앞에 당도 했을 때에는 눈을 의심했다. 그의 집은 아파트였다. 작가가 살던 좌우 아파트를 연결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을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흔히 기념관이라 하면 획일적인 단층 건물이거나 우람하고 큰 것만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럽의 기념관, 미술관, 박물관은 작가나 시인, 예술가들이 살던 소박함, 자연 그대로 후세에게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 그 유명한 만큼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친 그의 기념관은 생각보다 소박함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파트 입구 벽에 붙어 있는 명패는 그가 찬란한 광명의 작가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체취가 묻어있는 빅토르 위고의 기념관에 들어서자 한 작가가 살다가 떠낫던 당시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작가의 젊은 날에서 노숙한 말년까지의 사진, 작품집들, 그리고 가족들의 사진까지 진열하고 있었다.

빅토르 위고의 일생과 함께 집필할 당시의 필기구까지 전시 전열되어 있었다. 작고 아담한 아파트를 가식 없이 박물관으로 만든 프랑스인들의 지혜가 새삼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 한국 작가의 집을 저렇게 만들었다하면 하나의 웃음꺼리로 만들었을 일이다.

넓고 크게 지어놓고 안에 전시물이 없는 우리네 기념관에 비하면 속은 꽉 찬 내실의 진열은 보는 사람에게 가식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듯 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문학적 업적이나 예술적 성과를 중시하는 그네들의 삶은 우리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위고의 작품 중 장발장으로 널리 알려진 「레미제라블」은 ‘노틀담의 꼽추’라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한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므로 불후의 노틀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틀담의 꼽추’, 세계 명작이 되었고 빅토르 위고의 정신사와 사상사가 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작가와 작품을 일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독자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쩜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도 인간이고 인간이므로 불완전하다. 대개의 경우 저명한 예술가들을 만나보면 기대이상 광기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렇고 세계의 유명 배우, 화가, 작가, 조각가, 건축가들 또한 비슷한 경우이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 역시 그의 작품은 건강하고 훌륭하였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고결성에도 흠집이 있었다. 그게 바로 사생활의 문란이었다고 한다.

작가로서 작품을 쓰는 시간 외에는 주벽, 방종 등 인간으로서 요구되는 도덕적 경계를 넘어 방탕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조차 빅토르 위고를 멀리했고 경원시했다. 술주정뱅이로 고함을 지르고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유명한 작가, 고결한 인품, 위대한 사상과 예술 감각은 독자의 바라는 바 일종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한낱 기대일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으로 보면 예술은 일종의 광기에서 비롯되는 자기분출, 자기 형상화가 뒤틀려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빅토르 위고는 사실상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우했다. 1841년이었다. 빅토르 위고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딸 레오디느가 세느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를 보는 아버지 입장으로서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음을 그의 저서에서 밝힌바 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으면서 “내 죄악에 대한 벌이다”라고 고백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빅토르 위고는 딸의 주검 앞에서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접고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했다.

▲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자인 발자크의 동상과 그의 집무실     © 독서신문
그것이 자신의 과거.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는 계기로 그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집필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인의 삶과 그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사랑과 박애정신이 무엇인가 묻고 있는 명작이다. 이 글의 배경은 프랑스의 당시 비참했던 사회상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을 고양시킨 차원 높은 소설이다.

죄인에게 죄를 물어 징계하기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중요하고 이 사랑은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며 또한 법과 윤리를 넘어서는 종교적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빅토르 위고가 살던 아파트, 아파트 뒤쪽에는 공동 공원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아파트임을 대변하는 그냥 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의 내 것 지키기는 가위 본 받을 만 했다.

 
플로베르 저택의 숭엄함
나는 오늘날 우리가 모파상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스승이 프로베르가 있으므로 존재한다는 교훈을 일찍이 들은 바 있다. 세계 3대 단편작가를 일컫는다면, 모파상, 체홉, 포우를 들 수 있다.

▲ 모파상의 스승인 플로베르     © 독서신문
그 가운데 가장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작가가 기드 모파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문학기행은 어찌된 일인지 모파상의 생가가 아닌 모파상의 사부가 되는 플로베르의 생가를 찾는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모파상 뒤에 그분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솔직히 기드 모파상을 먼저 만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램이었다.

어제 빅토르 위고의 기념관을 찾았을 때에는 부슬비가 파리답게 내렸다. 촉촉하고도 깨적깨적 오는 것 같으면서 내리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 이런 날씨 속에서 훌륭한 예술가, 정치가와 사상가들이 탄생하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플로베르의 생가는 생각이상으로 크고 넓었다. 그의 부친은 의사로서 시내 한 복판에 3층 건물을 마련하고 환자들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 건물 1층을 비롯하여 3층까지 모두를 지금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버지시대 의사로서 간직하고 있던 인체해부도, 의료시설 도구와 침대, 인간의 해골과 뼛조각까지 하나하나 정성들여 전시되고 있었다.

아울러 플로베르의 창작실, 서재, 그의 필기도구, 사진, 당대의 저작물 모두가 손때가 베였지만 정갈 그 자체로 빛을 내고 있었다. “윤기”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의사였기에 플로베르는 과학적이면서도 적확한 문장을 모파상에게 가르치고 이를 요구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므로 모파상은 세계적인 작가로서 우뚝 설 수가 있었다. 프랑스, 영국,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작가의 집은 일반적으로 잘 가꾸고 매만지고 윤기가 나도록 후원회와 기념회 등이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었다. 내 마을의 문화를 이용하여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그것이 마을의 부가가치로 연결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능률적이고도 효율적인 자본주의가 철저히 몸에 밴 문화대국주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

플로베르의 집 후원은 정말 인상적이 도시 속의 숲이었다. 100평이 됨직한 뒷마당은 플로베르의 아버지의 실험용이었는지 모르지만 세계적인 허브가 저마다 각국의 영혼의 촛불을 달고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 허브를 울안에 심으면 파리, 모기 등 각종 벌레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된다. 해충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약용인지 주인공은 간곳없고 한국의 작가 시인들과 섞여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노라 야단들이었다.

나는 일찍이 사진 찍는 것보다 작가의 집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훗날 시간이 나면 기행문집을 새로이 쓰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빅토르 위고의 집은 아파트 전경이기에 홀로 독립된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정원과 기념관은 정말 멋진 풍경으로 유럽의 여름을 증명하고 있었다. 더욱이 내몽골지역 초원에서 그토록 시선을 끌었던 들 양귀비꽃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이재인/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국문학과교수     ©독서신문
예술의 도시 파리의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술적인 삶이 눈길을 끌었다. 세느강변의 그 무식하게 쌓아올린 에펠탑, 그리고 강줄기를 따라 문화가 흐르는 고서점과 골동품 상점들이 이방인의 시선을 잡아 이끌었다.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콩고드 광장이 저녁노을 속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 예술이든지 시간과 열정과 돈이 들지 않은 것은 다 생명력이 없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문과 예술과 사상은 모두가 땀과 시간과 돈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이제 발자크의 생가를 가야할 것 같아 가슴이 마구 설렌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