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가슴에 내리는 눈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가슴에 내리는 눈
  • 독서신문
  • 승인 2016.05.2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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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수필집 『새로운 장르 새로운 수필의 향연』을 읽고

▲ 김혜식 <수필가 / 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비밀이 없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어느 소설가가 한 말이다. 비밀은 비밀로 간수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 말인가 보다. 공감이 간다. ‘비밀 간수하기가 재물 지키는 일보다 더 힘들다’는 주석을 달아본다. 비밀 의미를 더 발가벗겨보자. 이 비밀이란 마력은 간직에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밀은 언제이고 탄로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쌍방 조합으로 생성된다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비밀을 지키자는 약조에 조문으로 “관 안에 들 때까지 말하지 않는다.” 며 눈도장을 찍는다.

여자는 나이가 들면 용감해진다고 했다. 그동안 가슴 깊이 꽁꽁 싸매놨던 비밀 보따리 끈을 풀어놓을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 비밀보따리를 풀어놓은 뒤로 내 마음이 더 이상 부자가 아니어도 좋을 만큼 용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이유식 교수 수필집 『새로운 장르 새로운 수필의 향연』에 수록된 수필「다시 써보는 백설부(白雪賦)」덕인지 모른다. 수십여 년 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하게 하는 힘을 지닌 김진섭의 ‘백설부’, 읽고 또 읽어도 새롭고 신선하다고 했다. 서정적이며 명상적 요소가 짙어 마치 첫눈 내리는 무게처럼 느린 만연체의 묘사가 이 작품을 더더욱 감명 깊게 만들었다고 했다.

60 년 전에 읽은 그 수필을 자신도 한번 리모델링 하고픈 욕심이 생겨 원작에 없는 여러 자료나 물감으로 덧칠을 해보겠다는 말이 구미를 당기게 하였기에 다시 한 번 ‘백설부’를 읽어봤다. 역시 흰 눈은 잡다한 생각을 품고 있는 지상 인간들에게 잠시라도 청결함을 교시하는 스승이고, 마음에 평화를 안겨주는 전도사였다. 내려서 쌓인 눈이 지나간 흔적을 잔류시키는 백색 도장밥이라면 모래밭의 자국은 불량품인 격이다.

자고로 인간사엔 ‘첫’ 자에 얽힌 사연이 많았듯이 내게도 첫눈에 대한 사연이 있다. 첫사랑 이야기다. 순진 덩어리(?)였던 나는 학창시절 남학생과 손만 잡아도 몸에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는 줄 알았다. 어머니의 밥상머리 교육이었기에 철석 같이 믿었다. 그래서 요즘 전철 안 풍경은 나를 곧잘 당혹스럽게 만든다. 옆 사람 보란 듯이 벌이는 젊은이들 애정 행각에 닭살이 돋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아둔함인가? 이제 우리들 학창시절 애정 얘기는 삼국시대에나 있을 법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 정말이지 당시 일부 처녀들은 남자와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혼전 순결을 목숨처럼 여겼다.

마음 놓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정담을 나누어 보기는커녕 길을 가는데도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남학생 뒤를 따라 빵집에 들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애정담이 있다. 그런데 꼬리가 길어 밟힌 것이 아니라 꼬리가 짧았는데도 들통이 나고 말았으니 운이 나빴나 보다. 어머니에게 발각된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불호령이 내려지고 둘에 만남은 도리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이다. 빵집에서 그 남학생과 만났다. 어머니 얘기를 했다. 그러자 남학생은 한동안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니 이렇게 말했다. '10년 후 첫눈이 내리는 날 낮 12시 정각에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만나자'는 제의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꼭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10년 후 첫눈이 내리는 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야 밝히지만 사실 그 때 나는 생활에 얽매여 그곳을 갈 수가 없었다. 이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온몸에 흰 눈을 소복이 이고 몇 시간을 추위에 떨며 나를 기다렸을 그 남학생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그때 약속하기로는 내가 혹시 그 약속을 못 지켜도 자신은 오후 3시까지 그 자리에서서 미동도 않고 나를 기다릴 거라는 말을 남겼다.

가슴 아픈 사연을 풀어 놓으니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그 남학생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쪽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올해도 첫눈은 어김없이 내릴 것이다. 지난해에도 그랬듯이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까만색 교복에 교모를 쓴 그 남학생은 눈을 타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내 가슴으로 내릴 것이다. 추억이란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지난날이 그리워진다.

첫눈 내리던 날 빵집, 그 빵집은 고층 아파트에 자리를 양보한 채 흔적도 없어졌다. 이유식 수필「다시 써 보는 백설부」에 담긴 소회처럼 눈은 영혼을 기억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랜드마크가 분명하다.

지난날 흰 눈처럼 순수하고 순연했던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죄 값으로 나는 두 눈을 감을 때까지 내리는 첫눈을 지켜볼 것이다. 여자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지킬 수 없는 약속의 대가가 이처럼 무거운 줄을 차마 몰랐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에 자위하며 가끔 지난날 애틋한 추억에 잠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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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먼저 2016-06-27 01:41:37
안녕하세요, 기자님. 기사, 잘 읽었습니다. 벙어리의 권장용어는 언어장애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 댓글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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