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배국환이 그 버금가는 경지를 찾아 나섰다. 배국환은 45년 전 중학생 때 한 학생잡지에 시를 내 당선됐을 정도로 문인 기질이 있었다. (당시 시인 고은이 심사평을 썼다, 나중 크거든 소주 한 잔 하자고) 그 기질을 숨기지 못하고 세월을 빙 둘러 우리문화 현장을 찾아 긴 한숨을 쉬면서 단발마 같은 목소리를 내는가하면 찬탄을 금치 못하며 눈을 다시 부비기도 한다.
기자는 배롱나무는 잘 몰랐다. 백일홍인줄은. 어쨌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배롱나무 꽃 핀 병산서원을 그리게 했다. 그런 식으로 배국환은 독자를 28편의 문화유산으로 이끌고 있다. 향기 가득한 수채화 그림과 함께.
저자는 작가 김진명이 찾았다는 일본 측 비밀보고서를 언급한다. ‘왕비를 끌어내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다.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을 당한 것이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했지만 부끄러워 공개를 못했다는 말도 전한다. 경복궁 건천궁 옥호루를 첫 머리에 올린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저자 말대로 피를 토할 것 같은 능욕의 역사를 잊는다면 우리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 단종의 애끊는 사연은 영월 청령포 산하를 적시고 있다. ‘청계천 영도다리에서 어린 신부를 마지막으로 본 후 이레가 지났구나’라고 저자는 어린 왕의 처연함을 보여준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어린 신부 밖에 없어 온갖 비감이 전신을 휘감았으리라. 저자는 말한다. ‘칼이 없는 권력은 허망한 것을…’. 저자는 단종의 죽음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면 권력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가져갔다. 수양대군이 가져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문종이 동생인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어린 아들의 훗날을 보장받는 것이 현명했을 거라는 판단이다.
추사의 세한도를 본다. 저자는 ‘헐벗은 송백과 초라한 움막을 / 말라붙은 붓칠로 / 간신히 / 간신히 / 완당 노인은 / 그렇게 / 두려움을 절제했다’며 문인화의 최고 정수에 대한 예를 표했다. 저자는 기획재정부와 감사원 근무시절을 잠깐 들려준다. 당시 논어를 읽으면서 처음엔 아는 문장이나 글귀를 인용해서 어디에 써먹을까만 궁리했다. 그러나 점차 글귀에 숨어 있는 깊은 뜻을 알게 되면서 자중하게 됐다고 한다. 추사 앞에 서면 옷깃을 여미게 될 것 같다는 말 아닐까.
저자는 가장 한국적인 브랜드로 달항아리를 꼽았다. ‘눈부신 하양도 아닌 / 촉촉함에 착 달라붙는 / 세상 품은 여인의 배처럼 /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 그런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네 (후략)“ ‘세상 품은 여인의 배’가 넉넉함을 준다. 저자는 프랑스 석학 기 소르망 얘기를 들려준다. 기 소르망이 한국을 찾았을 때 “백자 달항아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한국만의 미적 기술적 결정체”라고 극찬했다. 또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는 달항아리의 가치를 왜 활용하지 않는가”라고 한국 문화정책을 꼬집기도 했다고 한다.저자는 조선의 색은 한마디로 한다면 바로 달항아리색이라고 말한다. 최순우 선생은 잘 생긴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거 같지만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백자 달항아리가 좋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한국 전통미의 하나인 ’구수한 큰 맛‘을 달항아리에서 느끼는 것 아닐까. 간송 전형필에 대해선 우리나라 지폐에 넣어야 할 위인이라고 평가했다.
■ 배롱나무 꽃필 적엔 병산에 가라
배국환 지음 | 나눔사 펴냄 | 240쪽 |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