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에는 정답이 없다. 선택이 있을 뿐 , 연극 '모래의 여자'
모든 삶에는 정답이 없다. 선택이 있을 뿐 , 연극 '모래의 여자'
  • 김누리 객원문화기자
  • 승인 2014.02.2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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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누리 객원문화기자] 일본의 카프카로 불리며 현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아베 코보의 작품 『모래의 여자』가 새로이 다시 한 번 연극으로써 국내 무대에 오른다. 지난 2006년 고선웅 연출이 각색, 연출한 사례가 이 작품이 또 다른 신진 연출가에 의해 보다 참신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극으로 돌아왔다.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대표 구자혜 연출과 힘 있는 연기를 가진 두 남녀 배우로 만들어진 동명의 연극 <모래의 여자>는 초현실적이면서도 묵직한 원작 내용에서 드러나는 인간 실존 문제와 삶에 대해 차분하게 풀어냈다. 뿐만 아니라 본 작품은 차세대 신진 연출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ARKO 젊은 예술가 시리즈로 선정돼 보다 이목을 끌었다.

▲ 연극 <모래의 여자> 포스터 [사진 제공=씨즈온]

극한의 절망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에 대해 

<모래의 여자>에서 드러나는 배경 설정은 상당히 독특하다. 두 명의 남녀가 존재한다. 모래 구덩이 안에서 살아가며,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묻히지 않게 매일매일 퍼내는 작업을 하는 여자. 그리고 그 모래 구덩이 속에 타의에 의해 떨어져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남자. 원작과는 달리 남자는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아주 숨죽인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극의 내용은 사실 생각보다 더 단순하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곤충 채집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남자가 한순간에 모래 구덩이 안에 갇히며, 극한의 절망 속에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중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남자는 꾸준히 탈출을 시도한다. 자신을 여자의 집이 있는 구덩이에 던져 놓은 마을 사람들에게 애절하게 빌며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여자를 천과 끈으로 결박한 뒤 협박과 거래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남자는 어떻게 변화하고 행동하는가. 연극은 무엇보다 바로 그 ‘변화’ 자체에 주목했다.

극 중 ‘모래’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자는 물론 여자를 묶는 보이지 않는 족쇄이자 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이 된다. 남자는 외부로부터 강요받는다. 모래 구덩이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을 배급받고 싶다면 모래를 퍼내는 작업을 해라. 처음에 저항을 하던 남자는 점차 극도의 굶주림과 괴로움 속에서 외부에 복종과 수용을 하기 시작한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단지 하찮게만 보였던 여자의 일은 어느새 생존의 문제가 되어 남자 역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기서 모래는 불합리한 세계를 상징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인간은 두려움을 배운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객석에 앉아있는 우리, 관객들이 겪는 현재의 삶과 별다르지 않아서 불편하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새로이 찾아온 그 기계적인 일상에 적응하기 시작한 남자의 모습은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가치판단과 선택의 기로

그러나 결국 남자는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탈출을 한 남자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모래 길을 걷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남자는 발걸음을 망설인다. 그리고 이윽고 여자의 집이 있는 구덩이로 되돌아온다. 스스로 제게 찾아온 새로운 삶을 인정하고자 했다. 남자가 탈출하고 있던 중 또 다른 차원으로 남녀는 대화를 이어간다. 여자는 ‘걷지 않는 자유’에 대해 말한다. 외부에 나가면 끊임없이 걸어야 하지만 이 안에서는 자유롭다고 말하는 여자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선사한다. 평소 지루하고 기계적인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은 항상 보다 더 나은 삶, 이상을 꿈꾸곤 한다. 본래 극 중 남자 역시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해 바깥을 방랑하던 이였다. 하지만 그 것은 한편으로 언제 목적지에 다다를지도 알 수 없기에 늘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관객은 기존에 학습된 개념의 ‘자유’가 아닌 또 다른 의미로 ‘자유’를 이해하게 된다. 이는 분명 신선한 경험이다. 억압되어 있는 일상, 그 속에서 남녀가 찾는 새로운 ‘자유’와 ‘희망’이란 관객들에게 평소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남자는 말한다. “모든 삶에는 해답이란 게 없지. 그저 어느 쪽이 더 마음 편하고 나은지가 중요하지.” 본 연극은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떠나서 모래의 밖과 안은 결국 다르지 않은 세계임을 피력한다. 남자는 여자가 복통을 호소하며 모래 구덩이 바깥으로 나가며 재차 탈출의 기회를 얻었던 때에도, 끝내 “도망치는 방법은 다음날에 생각해도 되니까.”라며 도망을 포기한다. 우리는 흔히 삶의 형태를 비교하며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더 가치가 있고 없는 것이냐 나누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어떤 삶이든 가치 판단할 수 없이 인간을 실존케 하는 중요한 것임을 본 연극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결국 인간 스스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서 방향을 개척해 나가는 것임을 이 작품은 담담하게 전달한다.
 

참신하고 예리한 연출

모래 구덩이라는 극히 제한적이며 특정한 배경 안에서만 진행되는 이 연극은 극 중 시간의 흐름 파악이 무의미할 만큼 아주 정적으로 진행되지만, 한편 최대한 상징적이면서도 볼거리가 풍성한 연출로 이목을 이끌었다. 우선적으로 실제 극장의 무대 크기에 비하면 좁게 비춰지는 삼각형의 무대는 모래 구덩이라는 실제 재현하기 힘든 극 중 배경을 절묘하게 살려냈다. 바깥쪽으로 뻗어지는 모서리에 의해 더욱 아득한 내부를 연상케 하고, 그만큼 중앙 부분은 더욱 비좁게만 보인다. 남자와 여자의 행동은 대부분 일정한 무대 위에서 극히 제한되지만, 한편 상황에 따라 삼각형 무대의 주변부를 활용하여 보다 폭 넓은 동선 변화를 통해 캐릭터와 그들의 상황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외부와 내부라는 설정을 시각화하기 위하여 천장에서 떨어지는 줄과 양동이 등은 마치 관객들이 남녀와 함께 같은 모래 구덩이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전달한다.

무대와 조명을 통해 관객에게 보다 견고한 상상의 공간을 형성했으나, 그를 더욱 효과적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소리였다.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모래가 상징하는 거대한 외부의 살아있는 힘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 사람의 목소리와 깊은 한숨을 활용했다. 결코 실재를 모사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모래를 남녀를 제외한 제 3의 등장인물과 같이 느낄 수 있도록 훨씬 낯선 소리들로 생동시켰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기존 연극에선 쉬이 접할 수 없던 사운드 디자인에 큰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남녀가 내뱉는 언어는 대부분 절제되어 있어 단지 그들이 내뱉는 대사만으로도 모든 상황과 캐릭터를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본 작품에는 대부분 또 다른 언어로서 무용적인 부분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며, 특정 장소에서 변화하는 남자의 모습과 남녀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대해서 훨씬 동적으로 드러내준다. 언어, 무용, 조명, 소리 등 연극의 기본적인 기술 요소들은 서로 조화롭게 이루어져 관객이 오감을 모두 충족케 하며, 보다 깊이 있게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구자혜 연출의 참신하면서도 예리한 연출이 돋보인다.

연극 <모래의 여자>는 지난 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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