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의 학자인 이건창이 쓴 『혜강 최공전』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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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다작은 부단한 학문적 열정, 부유한 집안, 정치 불참여 등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덕분이다. 학문적 호기심이 무척 강했던 그는 태어나자마자 큰아버지에게 입양됐다. 그런데 아버지 최치현이나 큰아버지 최광현 모두 책을 좋아하고 재산도 많았다. 무과에 합격한 큰아버지는 중국 고서첩 수집이 취미였다. 그 덕분에 집에는 한문으로 된 서양서적도 많았다. 더욱이 큰아버지는 큰 재산가로 최한기가 평생 공부할 기반이 되었다. 최한기는 친아버지 최치현과 외할아버지 한경리로부터 주자학을 배웠다.
최한기는 스물 두살 때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70세 때는 고종황제의 시종이 된 아들 덕분에 중추부첨지사를 지냈지만 평생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그의 집안은 개성지역의 무인으로 정치권력과는 무관했다. 여기에 개성과 강화도 지역이 실학 경향이 강했던 점도 기존 유학자들과는 다른 시각을 갖기 좋은 환경이었다.
재야학자로 남은 최한기는 동서양의 수많은 책을 접했다. 그는 책 모으기에 집착했다.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청나라에서도 신간이 나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구입했다. 책 중개상들은 값비싼 책이나 신간이 나오면 그를 먼저 찾았다. 워낙 많은 책을 산 까닭에 그 많던 재산도 사라져 말년에는 생활고를 겪었을 정도였다.
많은 책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실에 거듭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 최한기는 20대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은 이론이나 학설보다는 수학적 실증적 사고와 경험주의를 따랐다.
최한기는 인간의 업적중의 하나로 ‘저술공덕(著述功德)’을 들었다. 책 쓰기는 앎이 많고 깊이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책 쓰기는 좋은 일,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의 이론적 작업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은 우리나라를 떠나 많은 사람에도 도움이 된다고 효용성을 말했다. “말로 남기면 가까이 있는 사람만 기뻐하는 데 비해 글로 남기면 먼 나라 사람도 즐겨 사용할 수 있다.”
/ 이상주(『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공부 열광』 『유머가 통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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