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폭력성을 소비하는 비열한 거리
유하 감독은 시인 출신의 감독이라서 그런지 영화를 화려한 비주얼로 장식하기보다는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이야기 구도가 탄탄하고 재미있다. 기승전결 구조가 뚜렷하게 살아있고, 큰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에피소드는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관객들이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영화적 볼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하 감독의 영화 속 볼거리들은 꾸밈없고, 사실적이어서 이야기를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지난 6월 15일에 개봉한 영화 <비열한 거리>는 유하 감독의 네 번째 영화이자, 인간의 폭력성과 조폭성에 대한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다. 전작인 <말죽거리 잔혹사>가 인간의 폭력성과 조폭성의 탄생을 그렸다면, <비열한 거리>는 그것이 소비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초적인 남성으로 자라기를 강요당하며 집단성과 남성성을 키워온 말죽거리의 소년들이 고스란히 자란 것만 같은 조폭 무리들은 집단을 이루어 자기네들만의 룰을 가지며 살아가고, 그 곳에서 역시 집단성과 남성성을 키워간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고 그것을 남성답다고 여기는 그들에게서 한국 특유의 폭력성과 조폭성을 발견한 감독은 그런 그들을 멸시하면서 동시에 이용하는 우리 사회 지식인층을 함께 등장시킨다. 그리고 얽히고설킨 이들의 먹이사슬 관계를 다시 한번 관찰한다. 조폭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부와 지위를 누리는 박검사와 황회장, 그리고 영화감독이 되어 필요에 의해 조폭친구를 찾아온 민호. 결국 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조폭들이 사실은 우리 사회 인간먹이사슬 중 가장 힘없고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사회가 조폭을 바라보고 이용하는 이중적인 시선과 잣대로 그들을 소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영화 속 장면들 |
월드컵 열기와 할리우드 대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관객들의 호응을 얻으며 선전한 영화<비열한 거리>는 김호경 작가에 의해서 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유하 감독이 시인에서 영화감독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긴 것처럼, <비열한 거리>가 영화에서 책이라는 매체로 재생산 된 것 역시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는 <비열한 거리>의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유하 감독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쓴 김호경 작가의『비열한 거리』는 영화의 큰 줄기는 물론, 에피소드들도 거의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빠르게 지나갔던 여러 가지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여 이야기에 깊이를 더했다.
영화와 책의 차이점을 찾아보면, 영화에서는 떼인 돈을 받으러 갈 때 병두 혼자서 가지만, 책에서는 부하들까지 모두 간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상철을 여동생의 결혼식장에서 죽이고 영필은 차에서 죽이는데, 책에서는 상철은 영화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지만 영필은 산으로 끌고 가서 멀리 도망가라고 협박만 할뿐 죽이지는 않는다. 또 영화에서는 병두가 아픈 현주의 집에 가서 죽을 끓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에서는 병두가 현주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으로 나온다.
책은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암시를 영화보다 더 빈번하게 등장시킨다. 우형사라는 인물은 책에서 몇 번씩이나 등장하며 민호를 불안하게 하고, 병두와 종수의 대화 중에 있었던 “저놈이 나중에 형님 잡아먹을 놈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병두의 마지막을 막내 춘호가 처리할 것임을 암시했다. 또한 책은 민호라는 인물을 영화보다 더 사악한 존재로 묘사하고, 종수가 병두를 배반하게 되는 과정을 추가하여 종수의 심리변화를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했다.
그 동안은 소설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비열한 거리>처럼 영화를 소설화하는 시도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김형경 작가가 영화<외출>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지만 영화의 흥행실패와 더불어 소설도 주목받지 못했다. 요즘 영화<비열한 거리>는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책도 많은 관심을 모을 수 있을 지 기대가 된다.
독서신문 1407호
저작권자 © 독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