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가난과 장애라는 조건...그러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책 속 명문장] 가난과 장애라는 조건...그러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유청희 기자
  • 승인 2024.09.12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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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당시 나는 무지했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싶었다. (...) 그래야만 내 현실을 견딜 수가 있었다. <16쪽>

너는 무심코 하늘을 보며 별이 쏟아질 듯 많다고 말했다. 나도 너의 시선을 쫓았다. 그러나 내 시력으로는 반쪽 남은 달만 보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별이 당최 생각나지 않는다며 네가 보는 별은 어떤 모양이냐고 물었다. 너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 그때 너는 대단한 것이라도 생각해낸 듯 말했다.
“파리가 노란 똥 싸놓은 것 같다”고. <17쪽>

그날 그 밤하늘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네가 선물한 반짝이는 별무리를. 찬란히 빛나다 사그라지는 빛의 입자를.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고, 너는 내 곁에 서서 내가 바라보는 하늘을 함께 바라봐주었다. <17쪽>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22쪽>

며칠을 끙끙 앓다가 엄마에게 몽땅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엄마를 대동해 다른 병원에 가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절망에 빠졌다.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이 철딱서니야! 너 이제 장님 된다잖아!” <22쪽>

“엄마가 다 잘못했어! 이 메시지를 들으면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 엄마가 잘할게. 미안해, 내 새끼!”
엄마가 엉엉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눈물을 꾹 참고 인기척을 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지? 앞으로 나한테 잘해!” <22쪽~23쪽>

장애는 이런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등짝을 걷어차버린다. <38쪽>

타이베이로의 출발, 그것은 왜 우리끼리는 안 되냐는 반항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거절과 더 많은 모욕과 조롱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52쪽>

“희곡은 정말 쓰고 싶어서 선택한 건가요? 꿈을 이루지 못해 억지로 잡고 있는 미련은 아닌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날아오는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한 새처럼 순간 정지했다. 마사지 시간이 끝났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려는데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미련……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저 희곡을 쓸 때보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더 즐거워요. 근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샌드위치가 꿈이 될 수는 없잖아요?” <197쪽>

그녀가 내게 따듯한 종이봉투를 안겨주며 말했다.
“방금 만든 제 샌드위치예요.”
내가 받은 것은 그녀의 새로운 꿈이었다. <198쪽>

“나도 글을 써요.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내 꿈이었어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 꿈을 정정했어요. 내 꿈은 무병장수예요.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살면서 글을 계속 쓰는 게 내 꿈이고 목표예요.” <198쪽>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펴냄 | 240쪽 | 16,800원

[정리=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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