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달 9월이다. 책장 앞을 서성이며 좋아하던 책들을 둘러봤다. 국내외 명망 있는 작가들과 세상을 떠난 학자들의 책이 근엄하게 나를 바라봤다. 필요와 호기심에 의해 산 책도 있고, 아주 감사하게도 여러 곳에서 선물 받은 책도 다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공들여 만든 두터운 양장본과 새 책들도 꽤 있다. 그러다 문득, 책장 한쪽 끝 빛바랜 고(古) 서적에 손길이 멈췄다. 청년 시절 읽던 책이다.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겼다. 표백되고 단단한 요즘의 고급 종이와는 달리 시간의 색처럼 누렇게 변한 종이, 잉크로 새겨진 작은 글자들과 낡은 종이 냄새, 귀퉁이에 뭉툭한 연필로 써 놓은 이제는 흐려진 메모들… 책장을 열자 그 시절 내가 행간 사이에 숨겨놓은 생각과 감정들까지 비쳐 올라왔다. 책은 그렇게 제 몸 보다 더 큰 기억을 품고 책장을 지키고 있었다.
책의 의미는 다양하다. 지식과 지혜의 보고, 역사의 조각, 세상을 변화시킨 혁신적인 생각 등등. 한 연구에서 책을 많이 읽고 자란 아이는 가난하더라도 좋은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책이 주는 뚜렷한 교육적 성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몇 십 년 넘게 책을 살피다보니 어쩌면 책이란 그것이 주는 지식과 정보 너머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책의 힘이란 그것이 담고 있는 언어와 내용이 아닌 책 자체라는 그 단순한 물성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닐까.
젊은 시절 읽은 책을 펼치면, 그때의 내가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투명하게 비쳐 올라온다. 그리고 그건 책 속의 글자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겹눈을 뜨고 아는 것이다. 책 속 문장을 읽던 그때의 내가 전혀 다른 문장들 위에 포개지는 것이다. 텍스트 그 자체로는 환기할 수 없는. 시간이 사는 마법의 성처럼 책은 그렇게 나의 한때를 보존해준다.
“인생은 재출발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시에 운행되는 열차와 같다. 그러나 책은 다 읽은 후에도 헷갈리거나 당황스러울 때는 언제든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당신은 원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 이해 못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튀르키예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고요한 집’의 한 대목이다. 이 문장을 나는 단순히 이렇게 이해했었다. 책은 인생과 달리 뒤로 가기가 가능한 매체라고. 하지만 어느새 이 문장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인생의 시간이란 치사하게도 편도 행 열차라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한 시절 열심히 책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그 책을 통해서 과거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종이는 변색되고, 반짝이는 젊음도 저문다. 하지만 책은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치열하게 책을 읽던 그 시간을, 그때의 내 고민을, 그 젊음의 사유와 변색되기 이전의 마음을.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어제보다 젊은 오늘, 단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절실히 읽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