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은둔형 외톨이만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생각이지만 정신적 불안 문제를 안고 있는 젊은이 중에는 이런 ‘자기가 정말 싫은’ 사람이 많은 듯하다. 아니, 젊은 층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자기긍정감’이라는 용어가 인터넷, 책 제목 등에 넘쳐난다(아마존 검색 창에 입력해보고 그 물량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긍정감을 둘러싼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를 뒤집어보면, ‘나는 내가 좋아’라고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장 자신을 상처 내는 자기애, 30쪽>
거울의 힘을 빌려야 하는 한 인간이 ‘진짜 자기 모습’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거울단계는 상상계 즉 이미지, ‘거짓 세계’의 기원이 된다. 라캉은 자기애의 기원 또한 거울단계에 있다고 보았다. ‘거울 속의 자기’라는 이미지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과 같다고 간주되어, 자기애는 부정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만 좌우가 바뀐 모습의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화하고 그것이 진짜 자기 모습이 아니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과정 전체가 거울단계의 자기 모습일지 모른다. <2장 ‘자기애’는 나쁜 것일까, 57쪽>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열 번 내리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심정으로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지원하며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일본의 소니 생명보험이 사회 신입 1년차, 2년차를 대상으로 ‘일할 마음 뚝 떨어지게 하는 사회 선배의 말’이 무엇이냐는 조사를 했는데, ‘이 일 적성에 안 맞는 거 아니야?’가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상대는 무심하게 던진 말이겠지만, 듣는 이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어 인격을 부정하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이 말도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과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 사이에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적성에 맞든 안 맞든 계속 다닐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은 치명적이다.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은 이 직장 안에 내가 있을 자리가 없고, 또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나 같기 때문이다. <3장 자아 찾기에서 ‘좋아요’ 찾기로, 115쪽>
‘헌신’이라는 지배 방식이 있다. 어머니의 지배가 언제나 고압적인 금지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에 헌신적이기까지 한 선의가 깔려있는 지배도 있다.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어머니, 딸이 자립해서도 수시로 연락을 하고 충고하려고 드는 어머니. 딸은 이러한 선의를 대놓고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어머니의 지배욕에 대해 어슴푸레 깨닫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은 괜한 죄책감만 안겨주기 때문이다. <4장 과거의 저주를 풀다, 183쪽>
간단하게 말해 ‘타인을 배려하면서도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자기표현의 자세를 의미한다. 상당히 성숙한 태도라 할 수 있는데, 이것에 앞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치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맞추기만 하는 조금 비굴한 자세가 된다. 반대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주장하는 자기중심적 태도가 된다. 양쪽 모두 문제가 있다. <5장 1장 자신을 상처 내는 자기애 중에서, 226쪽>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신감’이라는 특징에 자신이 해당된다면 왜 그토록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가에 대해 재검토해봐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다. 그 자기부정은 자기애에서 유래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6장 건강한 자기애를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44쪽>
[정리=이세인 기자]
『자해하는 자기애』
사이토 타마키 지음 | 김지영 옮김 | 생각정거장 펴냄 | 288쪽 |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