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이런 사랑 어떤가요: 서정춘, 「너에게-여하시편」
[시민 시인의 얼굴] 이런 사랑 어떤가요: 서정춘, 「너에게-여하시편」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6.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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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애인아

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

새빨간 거짓말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

우리가 오래 전에

똑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

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

똑같은 물이고 흙이었을 때

우리 서로 옷 벗은 알몸으로

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었겠느냐

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

다시 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

우리 여기서부터 빨리 빨리

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

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녁이

허물없이 우리를 녹여 버릴 테니

-서정춘, 「너에게-여하시편」

이런 사랑 어떤가요

서정춘은 「죽편(竹篇)」이란 시로 알려진 시인입니다. 1968년 『신아일보』로 등단해 1996년에야 첫 시집을 묶을 만큼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시력이 있습니다. 신경림은 구두쇠 같은 시인이라 말합니다. 그 정도로 시에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만큼 시심을 아끼고 아껴 내놓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보니 그의 시는 더없이 홀쭉합니다. 뼈다귀 시라 할까요. 발라 먹을 살점이 별로 없어 섭섭하지만 두툼한 시의 뼈는 구수하기도 하고 우려내면 낼수록 진하디진합니다. 그래서 첫 시집 제목을 ‘죽편’이라 했겠지요. 대나무 조각에 편편이 쓰듯 간결합니다.

이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부제 ‘여하시편’에 눈길이 갑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자(漢字)라도 옆에 써 놓았다면 더듬어 알 듯도 하겠지만 시인에게 직접 묻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하’가 ‘如何’라는 글자라면 넘겨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여하(如何)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뜻으로 묻는 이가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편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묻는 것입니다. 여하시편이란 부제로 이 시집에 세 편이 실렸습니다. 모두 사랑에 관해 선뜻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했던가 지금은/저만큼 혼자뿐인 그녀의 생/몹시 흔들리는 바람둥이 나에게/모가지가 꺾여져 하얗게 웃네/허리가 꺾여져 하얗게 웃네-「갈대-여하시편」” 시인은 묻습니다. 일편단심 사랑을 하지 못했다고. 그러니 여하(如何)?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고백에 “네 잘못이야.”라고 정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신파적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같은 유행가로 치부돼 버리고 말 것도 같습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했던가” 회한이 아픕니다. 시작은 사랑이었겠지만 상처로 끝난 사랑의 결말은 씁쓸합니다. ‘꺽여진 그녀의 생’ 앞에 시인은 ‘몹시 흔들린 채’ 서 있는 갈대와 같습니다. 아니 ‘그녀’는 이미 꺾인 갈대 같습니다. 모두 갈대숲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 「너에게」는 또 다른 사랑법에 대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시인은 ‘남모르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그래서 애인과 우리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냐고 확인이라도 하는 듯 노래하지만 어째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하(如何)? 어떻게 생각하나요? 묻습니다. 우리 사랑 아름답지 않냐고. 여전히 불안합니다. 답을 듣기도 전에 곧 또 다른 증거를 댑니다. 우리는 태초에 지은 원죄가 있었다고. 알몸으로 실낙원 했던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묻습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 아름답지 않냐고. 그러나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들도 압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의 도피를 감행합니다. 그렇다면 어서 달아나자 이 굴레에서 달아나 버리자 남모르는 사랑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결말은 비극입니다. 이카루스의 신화와 같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럴 위인이 못 됩니다. 그냥 남다른 사랑에 대해 꿈꿨을 뿐이며 저렇듯 이기적으로 파국으로 달려가지 못하기에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은 민들레와 같아서 그냥 홀로 미친 듯이 떠돌 뿐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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