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반성
또 다른 반성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4.05.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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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녹색 향연이 펼쳐지는 계절이다. 이 시기에 내리는 비는 녹우(綠雨)란 말이 맞는 성싶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초록색을 한껏 머금었다. 갑자기 빗물이 녹색으로 보여 깜짝 놀랐다. 다시금 눈을 비빈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필자가 서 있는 정원엔 초여름을 맞아 나무들이 피워낸 이파리들로 온통 초록색투성이다. 그러고 보니 이 색이 빗방울에 투영돼 일어난 착시 현상이었다.  

얼마 전 서울 대형 병원에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 서울역에서 내려 올려다본 하늘은 잿빛이었다. 금세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을 듯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 낮게 내려앉았다. 드디어 몇 분 후 하늘은 세찬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병원 도착 후 시계를 보니 진료가 한 시간여 남았다. 마침 시장기를 느꼈다. 그곳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샀다. 이것을 정원에서 먹을 때다. 내리는 비에 온몸이 젖은 새 한 마리가 종종걸음걸이로 곁으로 다가온다. 고개를 외로 꼰 채 동그란 작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주위를 빙빙 돈다. 또한 부리로 부지런히 땅을 쫀다. 먹이를 구하는가보다. 왠지 이런 비둘기가 안쓰러웠다. 먹던 빵부스러기를 땅에 던져주었다. 그 새는 땅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부리로 쪼아 먹는다. 

비둘기는 얼마간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새는 주린 배를 다 채운 듯 더 이상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곧이어 정원 숲속으로 잽싸게 날아갔다. 날아가는 새 뒤를 쫓다가 숲속 입구에 서 있는 나무 판에 적힌 문구에 눈길이 머물렀다. “ 환자의 건강을 위하여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비둘기 배설물이 환자의 건강을 위협합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 내용을 대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변명일지 몰라도 필자가 비둘기에게 한 행동은 미처 이 경고문을 못 본 탓이다. 무엇보다 따라오는 비둘기가 딱하여 먹이를 양껏 던져 줬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행동 하나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안겨준다면 그릇된 일이다. 이 생각에 이르자 이내 반성을 했다. ‘왜? 비둘기 배설물 생각을 못 했을까?’라고 자책하며 정원 바닥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곳엔 내리는 빗물에도 씻기지 않은 새똥 흔적이 군데군데 무수히 남아있었다.

쾌적하고 위생적인 환경이어야 할 병원 정원 아닌가. 이곳에 새들 배설물이 쌓인다면 환자들 건강을 위협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은 채 배가 고픈지 부리로 연신 땅바닥을 쪼는 비둘기였잖은가. 그 새를 동정한 나머지 진심에서 우러난 필자 행동이었다. 이로 보아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경우에 따라 해악(害惡)을 지니는 양면성이 있을 줄이야…. 무슨 일이든 행할 때 애초 그것이 지닌 이면을 꿰뚫는 혜안을 갖췄어야 했다. 이런 마음이 지혜고 사려 깊은 행동이다. 돌이켜 보니 필자 역시 웅숭깊은 사고(思考)엔 아직도 미숙하다. 

어린 날 어머닌 늘 밥상머리 교육으로 지혜와 국량(局量)을 갖추길 강조했다. 어머니 말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것이 초래할 영향 등을 미리 정의 및 분석하는 종합적 사고력을 지녔어야 했다. 이 또한 서투르다. 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도 발설하기 전 항상 입안에 세 번 침을 삼키라고 타일렀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타인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기에 그런가 보다.

언젠가 사석에서 일만 하여도 그렇다. 일명 짠 내 나게 사는 지인이 그날 모처럼 점심 식사를 사는 자리였다. 여러 명의 식사비를 혼자서 감당하는 게 고물가 시대엔 버거운 일이긴 하다. 이때 어느 여인이 그녀에게 농담조로, “로또복권이라도 맞았나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 지인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 말을 자칫 잘못 들으면 그의 선심을 비아냥거리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어서 일게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줘서 고맙다” 하면 될 일이었다. 훗날 지인은 진심을 외면한 여인의 처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나 보다. 그날 일로 인하여 지인과 서먹서먹해진 느낌이다.

이게 아니어도 세상사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마음의 잣대로 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아니던가. 인간관계만 해도 그렇다. 상대방이 아무리 진심으로 대하여도 마음의 눈이 오염되면 진실도 거짓으로 보이기 일쑤다. 모처럼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지갑을 열은 지인에게, “복권 맞았느냐?” 운운은 타인의 진심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어투요. 한편 지인이 그동안 삶에 쫓겨서 주변에 베풀지 못했던 무정(無情)을 꼬집는 말로도 들릴 법하다. 그러므로 평소 세 치도 안 되는 혀로 타인의 진심을 짓밟아 상처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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