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횡단자란 부모의 계급을 재생산하지 않고 출신 계급과는 다른 사회적 계급으로 이행한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이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렇게 출신 계급을 재생산하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전향자’(transfug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7쪽>
화려한 사회적 신분 상승에 성공한 계급횡단자들은 흔히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 찬탄 뒤에는 깊은 몰이해가 감춰져 있지만 말이다…. <55쪽>
그들은 매혹하고 꿈꾸게 만드는 존재다. 그들이 모든 예정조화와 섭리를 깨뜨리고 나타난,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 혹은 운명도 꺾지 못한 천재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믿기 어려운 기적과도 같은 그들의 운명은 몽상에 빠져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그들의 예외적인 이력은 합리적인 설명의 틀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존재가 재능과 기회의 신화, 요컨대 능력주의(merite) 신화의 살아 있는 증거 자체이다. 즉 그들은 개인적 성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밑거름으로 쓰인다. <55쪽>
모범생은 자신의 동급생들을 높은 교단 위에 서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다. 이 학생이 만약, 예컨대 동급생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 출신이라는 데서 오는 사회적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러한 선택받은 위치는 나르시시즘적 만족의 원천이 되는 동시에 악착같이 매달려 살아온 자신의 힘겨운 운명에 대한 상상적 복수의 원천이 돼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니 에르노는 학업적 성공을 높이 평가해 주는 이 학교라는 세계 속에서 일등을 차지함으로써 주어졌던 자신의 뛰어남을 인정받는 기쁨과 자유 그리고 특권을 누렸다고 고백한다. <85쪽>
오직 일등만 기억된다면 혹은 일등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외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학업적 성취를 통한 성공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 아닐뿐더러 일반 규칙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중 계급 아이들에게 학업은 성공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실패를 연속해서 맛보는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 계급 아이들에게 학교 시스템은 교양(culture)을 통한 해방의 도구로서 인식되기보다는 오히려 억압 체계로서 인식된다. (...) 학업을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은 그 외의 학생들을 쓸어버리는 공개 처형대 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97쪽>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usurpation)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은 빌려 온 것에 불과한 특성들로 우리 자신을 꾸미고 그 특성들이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착복하기 때문이다. <171쪽>
거대한 격차의 경험 이면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분오열된 몸과 마음이 있다. 계급횡단자는 서로 갈라진 두 개의 사회적 세계 사이에 매달려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매우 빈번하게 둘 사이에서 부침을 겪으며 스피노자가 (...) 마음의 동요라고 부른 상태의 먹잇감이 된다. <221쪽>
계급횡단자는 자신이 여전히 전적으로 민중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편에서 싸운다고 믿지만 정작 민중이 원하는 것은 완전히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민중의 이름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도리어 침묵시키면서 그들을 가르치려고만 했던 많은 민중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계급횡단자는 다른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해 상당히 경솔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더 이상 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223쪽>
우리의 목표는 계급의 장벽을 홀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그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310쪽>
[정리=유청희 기자]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샹탈 자케 지음 | 류희철 옮김 | 그린비 펴냄 | 336쪽 | 2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