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이별의 끝은 귀향하는 일: 김일영, 「얌전히 뜬 달도 깨끗이 씻어 걸고」
[시민 시인의 얼굴] 이별의 끝은 귀향하는 일: 김일영, 「얌전히 뜬 달도 깨끗이 씻어 걸고」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5.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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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가지런히 늙은 고무신도

냇물에게 배운 말들도 두고 가야지

어둠으로 건너간 산에서

소식처럼 새가 울고

눈송이 서너 개가 생각난 듯

마음씨 좋게 내리는데

동네 개야 짖지 마라

내 걷던 길마다 포개진 발자국들

길을 묻는데 개야

그리 서운하게 짖지는 마라

 

어느 집 구들이 소문 없이 데워지는지

마른 솔 연기 동네를 떠돌 때

둘 곳 없던 마음 차곡차곡

앞닫이에 개어 넣고 그러다

홍시 같은 추억이 물렁하게 만져지면

헛기침 한번 해보고

그래도 울렁거리면

아랫목에 데운 시선 내다보는 척

마당 곳곳에 나눠주고 나면 그치겠지

문틈으로 기어이 들어오는 찬바람도 그땐

밉지 않다 말해주어야지

-김일영, 「얌전히 뜬 달도 깨끗이 씻어 걸고」

이별의 끝은 귀향하는 일

늙은 고무신은 부모를 환유하겠지요. 냇물이 그를 키웠으니 맑은 심성으로 자랐겠지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시인은 어디론가 떠납니다. 사연은 알 수 없습니다. 소설처럼 칠흑 같은 밤일 것 같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점점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는 고개에 머물러 다시 뒤돌아봅니다. 그때 시인을 키웠던 모든 소리들이 한꺼번에 발길을 막아섭니다. 새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배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와 오래도록 어울려 서로 마음을 오갔을 겁니다. 이별의 끝자락에 서기에 앞서 이미 시인은 모든 사물과 이별했습니다. 그를 키웠던 마른 솔 연기와 마당 곳곳에 숨겨 놨던 슬픔과 매서운 찬바람까지도 이제 미움 저편으로 넘기고 떠납니다.

이 시는 이별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귀향의 서사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더 이상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깨끗이’라는 말 한마디로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을 것 같은 시인의 굳은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떠나는 사람이라면 지난 모든 기억을 무너뜨렸을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무엇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오래 간직할 것처럼 그것도 다시 고쳐 세워 놓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지 않았을까요.

왜 고향을 떠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짐작건대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겠지요. 미움을 받든 이유가 있을 테지만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향 상실이라는 현대인의 자아 상실과 연관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이데거는 오늘날 인간 실존을 고향 상실에서 찾았습니다. 이는 본래 있었던 나와의 결별이며 존재 이탈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인간 본질의 삶의 실존이기도 하겠지만 산업 사회가 잉태하고 만들어 논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을 떠나는 시인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피해자이며 인간 운명의 희생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질곡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 떠나야 합니다. 버틴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닙니다. 이미 고향은 다른 모습으로 낯선 이름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양상을 고향 상실과 짝을 이루어 귀향, 즉 고향 회귀를 언급합니다.결국 상실 속에서 인간은 회복을 위해 다시 발길을 돌리는 시간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위 시에서 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분명 귀향의 시간일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별은 행복을 위한 첫걸음을 약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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