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수상한 책 한 권이 내게로 왔다. 먼 들의 봄을 품은 채, 정다운 친구의 글씨로 ‘인상 깊은 책. 자주 떠오를 거야’라 쓰인 쪽지를 달고. 과연 친구는 옳았다. 책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있는 내게 이 책은, 특히 아이의 시선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린 첫 챕터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책은 반도 읽히지 못한 채 책장에 꽂혔다. 그렇게 책이 뽀얗게 먼지를 입어가는 동안 내 안에서는 뚜렷이 익어가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쌍둥이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 위한 ‘훈련’으로 서로에게 거친 말을 하는 장면, 나아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랬다.
(...)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반복하다 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 아고다 크리스토퍼,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中
그들은 이런 훈련을 통해 마침내 ‘장님과 귀머거리가’ 될 수 있었다. 왜 아니었을까. 과한 자극은 도리어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드는걸. 반면 육아하며 듣던 조언은 그와 좀 달랐다. 아이에게 ‘언어 자극’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 표현도 듬뿍듬뿍해 주어야 좋은 엄마라고. 하지만 나는 서사가 안으로 흐르는 사람. 그런 내 곁에서 아이의 첫말이 터져 나오던 때, 아이의 하루를 알뜰히 채워주기 위해 더 많은 말을 해야 한다는 조언은 타당한 만큼 고단한 무게로 나를 죄어왔다.
아마도 그쯤이었겠지. ‘이 책이 자주 떠오를 거’라던 친구의 말이 참이 됐던 건. 정말로 이 기이한 소설은 자꾸자꾸 떠올라 때마다 묘한 위로를 건넸다. 쌍둥이의 일화를 읽고 ‘말’에 대한 부담에서 홀가분해진 것만 봐도 그랬다. 세상에 말처럼 흔한 게 또 있을까 싶어졌다. 내처 아이에게 AI처럼, 영혼 없이 반복하던 말은 없었나 꼽아보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동 재생되는 ‘안 돼’부터 국민 용어 ‘그랬구나’, ‘네 맘 알아’ 등이 머릿속을 풀썩인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훈계도 칭찬도. 여름날 풀처럼 그저 무성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아이 마음에 가닿지 못한 채 흘러버렸다면? 아무리 알차고 고운 말이라도 너무 빈번해서 솜털만 한 기척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애초에 텅 빈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실은, 아이에게 한마디 해놓고 내 말에 내가 놀라거나 앓는 일도 드물지 않아서 아이에게 내는 말에는 더욱 고민을 들이게 된다. 문제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욱하기 일쑤라는 것. 그렇대도 시중의 대화 예문을 공식처럼 외워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너무 쉽게 상황을 쓱싹 매듭짓는 건 아닐까, 마음이 좋지 못해서. 다행히 그렇게 어정대다 장한 말 한마디 내기도 전에 아이 표정과 풍경이 말끔히 개어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아이가 도리어 ‘엄마 마음, 나도 알 것 같아요’하고 나를 어루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폭하니 등허리를 감싸는 여리고 따스한 기운. 아이가 자랄수록 그걸 느낀다.
“엄마, 밥 먹었어요?”
하교한 아이가 달려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있었다. 어영부영 웃고 섰자니 대번 볼멘소리다. “아니 몇 신데 아직도??” 아이코. 우리 엄마 단골 레퍼토리를 이젠 내 아이가 한다. 그게 그리 재미나서 둘이 깔깔 웃고는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어 마주 앉았다. “엄마, 함미가 그랬는데 점심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이래. 점심 꼭 먹어요. 난 오늘 두 그릇 먹었단 말야.”
역시 좀 뚝뚝한가 싶다가도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간지럽히는 옆자리 작은 사람. 가끔 나보다 마음보가 너르다. 이대로라면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혹은 정답 같은 말뿐이 아닐지라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 다문다문 그러나 오래오래. 진심 어린 예쁜 말을 나눌 수 있다면. 내 몫의 파스타를 거즌 내주고도 아이의 어여쁜 말에 배가 부르던 오후를 스친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