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시민 시인의 얼굴]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4.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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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나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삶의 진정한 가치는 길 위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떠남과 돌아옴의 공간이자 움직이는 삶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든 스승들이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에서 떠나 세상을 헤매다 어느 순간 그 소중한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돌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길(道)’로 가라 합니다. 이런 가운데 누군가의 삶은 또 누군가의 삶을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스치듯 만나 자기 갈 길 가는 것이 이별이 아닐까요.

기형도는 길 위의 시인입니다. 호모 비아토르, 즉 여행하는 인간, 혹은 순례하는 존재라 부르고 싶습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간을 ‘순례하는 존재’라 불렀던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여행자이며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길 위에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순례와 같아서 아무 데고 떠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느끼며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시에 등장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그를 따라 시인은 길을 떠났던 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와 시인은 길 위에서 어떤 실존과 맞닥뜨렸나요. 시인은 길 위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쾌락을 찾아 헤맸던 나날은 이별을 거듭하며 그의 삶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모두 사상누각, 모레 위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그럴수록 다시 돌아갈 곳, 처음 떠났던 그곳에 대해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그곳에는 상처의 흔적만 선명하고 아귀 같은 현실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깊은 회한에 빠집니다.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좇았던 ‘그’는 무책임하게도 그만 따르라 말합니다. 그는 허상이었나 봅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이 절망입니다.

기형도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문청, 즉 문학청년이 아니어도 젊은 시절 한 번은 거쳐야 할 아이돌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극적인 그의 삶이 크게 좌우했습니다. 윤동주 신화가 그에게도 드리워졌습니다.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생체 실험 희생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수한 영혼을 마감했습니다. 식민지 청년이 아니었으면 만개했을 생명이 안타까워 그의 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기형도 역시 요절하였습니다. 군사 독재 시대를 거치며 암울했던 시절을 살다 새로운 세계를 열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상실이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길 위에서 방황하다 그는 되돌아올 줄 모르고 아예 이 세상과 결별하였습니다. 위 시에서 ‘그’가 다시금 궁금합니다. 왜 시인을 버리고 가버렸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길 위에서 중얼거리며 이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귐, 나눔, 보살핌의 결핍 때문은 아닐까요.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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