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팔리지 않은 삶을 위하여: 이덕영, 「우시장에서」
[시민 시인의 얼굴] 팔리지 않은 삶을 위하여: 이덕영, 「우시장에서」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4.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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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팔린 소들이

팔리지 않은 소들을 바라본다.

우시장 어귀의 쇠똥냄새 위에

가을은 저물고

힘없는 짚검불이

바람에 불려다니는 근처의

발목들의 당당함을

곁눈질을 본다.

소가지 없는 소가 어느 놈인가.

이제 풀비린내도 시들고

열 마지기의 논도 작별하다.

큰 눈에 콩밭두렁의 이슬이 떨어진다.

팔리지 않은 소들이

팔린 소들이 바라본다

빈 발목이 쓸쓸해지기 시작하고

고삐에 부딪는 햇살 한 줌을

나누어 새김질하며

팔린 소들과

팔리지 않은 소들이

저무는 가을 속으로 저마다 돌아가고 있다.

-이덕영, 「우시장에서」

팔리지 않은 삶을 위하여

할아버지는 소 장수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소 몇 마리 대신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소죽 끓이는 겨울 새벽이 아직도 문틈으로 보입니다. 무명천이 풀려나오듯 뽀얀 연기가 피어나고 콩 볏짚 푹 삶은 냄새가 구수합니다. 질겅질겅 아삭아삭 바득바득 여물 씹는 소리가 여전히 귓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할아버지 등판으로 다 가시지 않은 소 콧잔등 훈기와 쨍한 아침 햇살이 왠지 쓸쓸했습니다. 이런 풍경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덕영 시인이 쓴 시 한 편이 잠시 마음을 쓸고 갑니다. 그는 충청도 시인입니다. 마흔 남짓 살다 간 외진 시인입니다.

시 「우시장에서」는 서둘러 우리를 저무는 가을로 데려갑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아 애를 태우고 핏발 서린 눈으로 서로를 강타하던 밤이 지났습니다. 다 파한 우시장 한 켠에 등 갈기 까칠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소의 눈망울이 멀뚱합니다. ‘팔린 소’와 ‘팔리지 않은 소’의 차이는 무얼까요. 시인은 그렇다 한들 모두 저 가을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체념한 듯합니다. 바람에 불려 다닌다 해도 무슨 소용이냐고, 힘없는 빈 발목이 쓸쓸하다고 노래합니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풀 비린내’ 나는 청춘과 헤어져 땀 흘렸던 ‘논밭’과 작별해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선택이 나와 무슨 상관있을까요. 모두 저당 잡힌 삶이 아닌가요.

다시 시를 읽어 봅니다. 팔린 소와 팔리지 않는 소 모두 고단하게 ‘새김질’한 시간 앞에 머리 숙입니다.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그 누군가의 선택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단지 선후의 자리 바뀜밖에 없습니다. 결국 다시 소환해 가려 하는데 무엇으로 당해낼 수 있을까요. 시인은 거듭 묻습니다. “소가지 없는 소가 어느 놈인가.” 속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침묵하며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지요. 백여 리를 걸어 소 두 마리를 끌고 갔던 새벽이 지나고 다음 날 새벽에 팔리지 않은 소를 데리고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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