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시민 시인의 얼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4.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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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가

눈을 세원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김광규, 「어린 게의 죽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시민 시인의 얼굴을 오심 명쯤 떠올리니 해방 이전 시인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습니다. 근대 문학 백 년을 훌쩍 넘겼는데 손에 꼽을 만한 시인이 협소합니다. 매번 시월쯤이면 노벨 문학상을 이번엔 한국 작가가 타지 않을까 수선거림이 들리는데 자기기만 같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여부로 문학의 순도를 따지는 행위를 아직도 계속하는 것은 왠지 어린애 장난만 같습니다. 시는 선물이라 말했던 데리다를 생각하면 시는 무슨 보상을 바랄 때 이미 시는 선물이 아니라는 아이러니와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 문득 김광규가 떠올랐습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시인이 비로소 시민 시인의 얼굴로 등장합니다.

김광규 하면 떠오르는 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죠. 이 통속적 제목이 주는 몽롱함이 제법 맛깔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1979년 쓴 작품으로 1960년 4.19혁명이 좌절된 역사를 사랑으로 환기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패배였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보다 먼저 세상을 뒤엎었던 기억을 지울 수는 없기에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부끄러웠던 시절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 「어린 게의 죽음」은 ‘희미한 옛사랑’을 있게 한 작품입니다.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던 시민의 함성이 뜨거웠던 무렵 이 시는 잉태되었습니다. 군사 정권에 짓밟혔던 시민의 자유가 어떻게 허망하게 사라졌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광규는 보기 드물게 시인의 태가 나는 학자입니다. 교수들이 쓰는 시가 시의 본령에 들기에 쉽지 않은데 그는 색다릅니다. 자기보다 타자에 눈을 더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 시처럼 김종삼의 시에도 유사한 이미지가 알레고리로 담겼습니다. 「두꺼비의 역사(轢死)」란 시입니다. 역사(轢死), 즉 차에 깔려 죽음을 뜻합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희생된 시민 생명을 비유한 것이지요. 시 「어린 게의 죽음」도 그러합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자이지만 ‘해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중 하나가 ‘정의(jutice)’입니다. 어린 게의 죽음 앞에 정의라고 써 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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