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려은의 데일리 소나타] 고독에 대하여
[이려은의 데일리 소나타] 고독에 대하여
  • 이려은
  • 승인 2024.04.0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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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려은(민재)      수필가 / 비올리스트 / 목포시립교향악단 viola 상임 수석 연주자 역임
이려은(민재) 수필가/비올리스트
/목포시립교향악단 viola 상임 수석 연주자 역임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이 며칠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런 쌀쌀한 기온 속에서도 나뭇가지엔 여기를 보란 듯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꽃망울들이 봉우리를 터뜨릴 준비로 분주하다. 어느새 매화는 개화한 지 꽤 여러 날 째다. 자연은 이토록 희망찬 새 봄을 알리느라 분주한데, 왠지 오늘의 내 마음은 이런 봄날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슴에 회색빛 슬픔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많은 이들도 그렇겠지만, 내 마음은 서로 상반하는 양면성으로 가득하다. 나의 천성은 매우 밝고 쾌활한데, 동시에 센티멘털하고 어두운 내면도 상존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환경적 영향도 있을 듯하다.

어린 시절에 잠시 할머니 댁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여동생을 동시에 돌보기가 어려워 나를 할머니 댁에 맡기신 것이다. 어린 나는 ‘하필이면 왜 내가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하지?’ 라는 의문을 항상 가슴속에 품으며 고독하게 지냈다. 이후 성장하면서도 고독은 항상 나의 삶과 동행했고 내 삶의 한 단면이 되었다.

물론 할머니 댁에서 지낸 날들이 항상 고독한 시간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늘 밭일을 하시며 힘에 겨워 흥얼거리던 유행가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막내삼촌이 즐겨 부르던 김광석의 노래들 때문이었다. 채 6살도 되기 전에 어른들이 부르는 세상사의 유행가 가사들을 따라 부르며 내 정신은 자연스럽게 성숙해졌다.

특히, 그때부터 즐겨 듣고 있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 나왔던 곡은 내 인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었다. 그 곡은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가 1912년에 작곡한 보칼리제< Vocalise >라는 곡이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러시아적인 색체가 잘 드러나는 곡임과 동시에, 13개의 성악 가곡 작품 중 한 곡이라 할 수 있다. 이 곡의 특징은 성악곡이지만 가사가 없이 오직 사람의 목소리로만 음악을 표현을 한다는 것과, 일종의 허밍과 같이 부르는 성악의 연습곡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가사가 있는 곡만이 꼭 청중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곡의 매력은 가사없이도 청중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이다. 할머니 집에서 라디오를 켰을 때, 이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린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 때는 음악이 지닌 예술성도 모른 채 이 곡이 동요보다 듣기 좋았다. 그 후, 이곡은 어린 나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곤 했다. 요즘 이 곡은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연주되고 있다. 성악가들의 노래로, 오케스트라나 솔로 악기의 연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고독은 내가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된 셈이다. 어려서부터 내면의 생각이 매우 조숙했던 나에게,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고독했던 나에게 음악은 천생연분이었던 것이다. 결국 음악을 전공하고 연주가로서 활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 사는 것은 쉽다. 고독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도 쉽다. 하지만 진정한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고독을 완벽한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자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이다.

에머슨의 말처럼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고독을 즐기며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해준 추억 속의 곡인 ‘보칼리제’를 듣고 있다. 눈만 뜨면 볼거리가 많고 스마트 폰에선 연신 소통을 원하는 카톡음이 들려온다. 세상 사람들은 잠시도 나를 혼자 있게 놔둘 생각을 안 한다. 나는 많은 이들과 통화하고 문자로 소통하면서도 마치 외딴 섬에 갇힌 듯 늘 마음이 허하다. 이룰 수 없는 꿈이 손닿지 않는 먼 허공에 위치해서일까?

어느새 ‘보칼리제’의 선율이 어두운 방안을 깊이 감싸는데 싫지 않다. 밤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려서 일까? 에머슨의 말처럼 진정 위대한 자는 아니어도 이 고독과 힘껏 싸워 승리자가 되고 싶어서 오늘도 홀로 ‘보칼리제’를 들으며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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