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거기 이름 없는 꽃잎이 되어: 유진오, 「이대루 가자」
[시민 시인의 얼굴] 거기 이름 없는 꽃잎이 되어: 유진오, 「이대루 가자」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4.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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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죽엄인들 대수로우냐

이대루 가자

괴로움이면 차라리

뼈를 앗으라

사나운 바람 속에

눈물 어려 살아왔다

가야만 할 길이다

꽃잎처럼 떨어지자

하나 둘

헤일 수 없이

짓밟혀간다

아까운 목숨들이

악착스러 짓밟힌다

사나운 발굽 밑에

꽃잎이 있다

번쩍이는 총칼 밑에

목숨이 있다

꽃 같은 목숨이

따 우에 떨어졌다

떨어진다

허수히 죽는게 아니다

그냥 스러지는

꽃 같은 목숨이 아니다

땅 속에 흙 속에

다시 피리라

죽어도 떨어져도

꽃은 피고

꽃은 남는다

죽엄인들 대수로우냐

이대루 가자

괴로움이면 차라리

뼈를 앗아라

-유진오, 「이대루 가자」

거기 이름 없는 꽃잎이 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없는 듯 눈길 주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소위 해방기 문학입니다. 중등 역사 교육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시기입니다. 잘못 언급하면 동티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분단 현실을 가장 아프게 끌어안은 역사적 악몽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유진오 하면 언뜻 소설 「김강사와 T교수」를 쓴 유진오를 떠 올릴 겁니다. 아닙니다. 이름은 같지만 시인 유진오는 전혀 다른 삶을 산 인물입니다. 소설가 유진오가 해방 이후 법학자로서 정치가로서 명망을 누리지만 친일 부역한 전력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시인 유진오는 일제 강점기에 거칠게 제국주의와 맞섰습니다. 해방기에도 변함없이 시민 선두에 서서 불꽃처럼 살다 스러졌습니다.

시 「이대루 가자」를 보면 유진오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어떤 수사도 비유도 없이 몸에서 우러나는 목소리 그대로 우렁찹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할 시대 소명이 그를 맨 앞에 세웠습니다. 살아서는 절대 나를 위해 노래하지 않고 죽어서야 무덤가에 아름다운 꽃이 피길 소원했던 오장환이 떠오릅니다. 그처럼 시대가 그를 이렇게 노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를 두고 임화는 ‘전위시인’의 면류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의 얼굴에 빨갱이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져 추방당한 처지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보듬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잊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념보다도 어떤 체제보다도 사람 목숨을 종교처럼 여기는 시인이 진정 시인이 아닐까요.

또 다른 시 「나는야 거기 이름 없는 꽃잎이 되어」처럼 그는 스물아홉 청년으로 산화합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때, 어디선가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될 때마다 그가 뛰쳐나와 전위에 서서 목청 높여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한번 먹은 마음을 변함없이 간직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시인이 지금 우리 곁에 있기는 한 것인지 아득합니다. 4월이면 엘리엇의 『황무지』 첫 구절이 생생합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이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그렇습니다. 얼어붙은 땅 밑으로 봄싹이 돋아나고 있는 생명의 위대함이 눈물겹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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