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릴 만한 이유를 내밀 게 없다. 2년 하고도 2개월 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기획서를 출력하여 회의에 가져가면서 품은 내 심정이 그랬다. 영미소설 시장은 영광의 시절이 지나간 지 한참이었다. 현지에서 진작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이 나와도 분야 베스트 중상위권에 잠깐이나마 얼굴을 비추면 다행이었다. 저명한 작가의 신작도 국내 힐링 판타지물과 일본 로맨스소설에 맥을 못 췄다. 손꼽히는 어느 대형 문학 출판사에는 해외문학을 담당하는 마케터가 이제 단 한 명이라고 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도 아니고, 이 상황에 아무도 모르는 작가의 순문학을 다산북스의 기획회의에 들이밀려니 당당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도 대형 출판사면 회사 이름에 걸맞은 이런 책 좀 내야 되지 않겠냐’ 하는 뻔뻔함만이 내가 꺼내든 유일한 카드였다.
영미소설을 향한 독자들의 푸대접에 “오호통재라” 하며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는 편집자로 나를 오해할까 하여 미리 말하자면 절대 아니다. 편집자로서의 나에게 해외문학이라는 분야는, 명절에 한 번 통과하는 지방 톨게이트 정도쯤 될 거다. 본업에서 그리 잘 풀리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나는 인문․에세이팀에서 인문서와 에세이를 만드는 편집자다. 다만 수년 전에 ‘매들린 밀러’라는 작가를 한국에 소개하며 독자들로부터 받았던 희열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어서, 그 기쁨을 다시 맛보고 싶은 마음에 기회를 틈타 가끔 외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해외문학 담당자도 아닌 사람이 난데없이 처음 듣는 아일랜드 작가의 순문학을 기획회의에 가져와서 빈약한 근거를 토대로 이 책은 꼭 내야 한다고 떠드니 반응이 어땠겠는가. 하도 양서라고 주장하니까 반대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찬성하긴 찝찝했을 거다. 다산북스의 기획회의에서 주고받는 의견은 회사의 그룹웨어에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자료로서 영원히 남게 된다. 그로부터 2년이 넘게 지나 이 책이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지금도 일부의 반대 의견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지금에야 그 의견의 주인들이 조금 민망해할지 몰라도, 나는 그분들의 반대가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회사에나, 기획자에게나 딱 이 정도의 기대로 출발했다. 나중에 작품이 부커상 후보에 올랐어도, 그리고 작년 초에 배우 킬리언 머피가 영화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어도 그 기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영미소설의 불황이 굳건했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된 지 2년이 흘렀는데도 이 책이 독자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고 스테디셀러로 확실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를 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변화는 영화 <말없는 소녀>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작년 4월에 미리 출간한 클레어 키건의 초역작이자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조금도 밀릴 것 없는 명작 『맡겨진 소녀』는 원래 덤으로 사온 것이었다. 나는 애초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었다. 『맡겨진 소녀』는 “아이템, 즉 소설 한 권을 사오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에 새로운 작가 한 명을 데려올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다산북스 대표님의 주장에 따라 얼떨결에 같이 판권을 사온 타이틀이다.
기획회의에서 통과될 줄도 몰랐는데 소설 하나의 판권을 더 사오라니, 이 무슨 횡재인가 싶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니, 덩달아 사온 이 『맡겨진 소녀』를 영화화한 작품이 한국에서 개봉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꽤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영화가 한국에 건너오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영화 이슈가 있다면 출판사는 그것을 반드시 타야 한다. 따라서 출간 순서는 덤으로 사온 작품부터 출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23년 4월 26일 『맡겨진 소녀』가 먼저 출간되었고 한 달쯤 후에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 배급사인 슈아픽처스와 함께 각종 협업을 진행했고, ‘내가 일을 하면서 이런 분들과도 엮이게 되는구나’ 싶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분들께 지금 다시 생각해도 영광스러운 추천과 호평을 받았다. 극장에서는 유명한 작가와 평론가를 모시고 『맡겨진 소녀』와 <말없는 소녀>를 한 주제로 묶어 GV를 여러 차례 진행했고, 클레어 키건을 국내에 소개한 나 역시 GV의 게스트로 초청되는 희한한 일도 겪었다. 나는 그 상황 자체가 민망하여 우리 회사 직원 누구도 그 행사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래서 『맡겨진 소녀』는 베스트셀러에 올랐을까? 영화 개봉으로 인한 이슈를 한창 타고 있을 때조차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종합 베스트는 물론이고 소설 분야 1위에도 결국 오르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대형 문학출판사에서 전사적으로 미는 국내소설을 넘어서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고, 출간 후 수개월이 지나도, 블로그나 SNS 리뷰가 올라오는 빈도는 크게 줄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또 희망적인 사실은 영화나 소설만이 아닌 클레어 키건을 두고 이야기가 계속 돌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줄곧 해온 이야기가 있다. 이미 뜬 작가보다 무서운 저자는 ‘독자가 도사리고 있는 작가’이다. 신간이 나왔을 때 드디어 나왔다고,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떠들어줄 독자들이 포진된 핫한 저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독자들 사이에 정말 무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다. 『키르케』를 내기 전의 매들린 밀러가 그랬고, 『숨』을 내기 전의 테드 창은 훨씬 더 그러했다. 당시 나는 클레어 키건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즈음부터는 키건의 책을 향한 의구심이 회사에 여전히 존재하든 말든, 나는 이 작가의 후속작이 크게 잘되리라는 데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출간되자마자 꽤 잘 팔렸다. 해외소설 1위에 올랐고 영미소설치고 좋은 성적이었다. 출간 후 한 달쯤 지났을 때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다. 온라인 서점 곳곳에서 소설 분야 1위에 올랐고 소설치고 종합 성적이 썩 좋았다. 대형 문학출판사보다 소설을 잘 팔고 있다는 현실이 어색했다. 출간 후 두 달이 지났을 때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알라딘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찍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 아닌 책 중에서 영미소설이 1위에 오른 일을 내 근래의 기억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미천한 출판 경력에서 직접 기획한 책 중에 이만큼 팔리고 화제가 되는 책도 처음이다. 그래서 요즘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매일 아침 아일랜드 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출근한다고. 그러나 이 책의 성공이 내게 특별한 기쁨을 주는 이유는 따로 있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의 글을 굉장히 좋아한다. 온갖 맛집을 찾아다니고 그에 대한 글을 써온 황작가는 말해왔다. 흔히들 주관적이라고 여기는 맛의 세계에도 “맛집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즉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맛집”이란 존재한다고. 매우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책의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은 존재한다. 그리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나의 기준에서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선전이 나에게 더없이 특별한 이유는, 때로는 좋은 책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상품도 종종 내왔던 듯한 나 같은 편집자에게, 좋은 책으로 성공하는 기쁨을 안겨주고 있는 데 있다.
앞으로도 나는 이 특별한 기쁨을 잊고, 객관적으로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책도 가끔은 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종종 그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내가 만들어온 상품들을 돌아볼 때 좋은 책의 비중이 훨씬 더 크기를, 그리고 좋은 책일수록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