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건이 터졌을 때 관련된 뉴스를 대충 훑어보고 댓글과 ‘좋아요’로 여론을 파악하곤 한다. 댓글은 최신순이 아닌 베스트순으로, ‘좋아요’는 엄지가 많은 순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다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댓글은 평소에 다는 사람들만 주로 달고, ‘좋아요’도 누른 사람들만 누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왜, 그리고 언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할까.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여 이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유지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반대로 말하면, 동조하지 않을 때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도태될 거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책 『동조하기』는 이처럼 분열된 세상에서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동조하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동조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면밀히 참고할 때 좀 더 나은 행동을 한다. 떄때로 우리는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자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동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옳다고 확신할 때 더 적극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고, 대중의 의견을 거부하곤 한다. 개개인의 관점에서 ‘동조하기’는 대개 이성적인 행동의 과정이고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적 영향은 집단 내에서 전체적인 정보의 수준을 저하시키고, 개인과 기관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는 동조자들에게 반대자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고, 그래서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며, 그 결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동조에 수반되는 위험을 줄인다.
역설적이게도 순응할수록 우리가 속한 집단은 피해를 본다. ‘침묵하기’는 집단의 개선과 성장에 필수적인 것들을 제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새로운 관점이 무시당하고 부정당할 때 진보는 멈추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과 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생각 없이 의례적인 행동만을 하는 좀비처럼 집단에 속해 있기 위해 집단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조가 심해지면, 사회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는 공포를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이 불러올 개인적, 집단적 비용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동조하는 사람들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반대자들은 반사회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 동조자들은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반면에, 반대자들은 그런 유대를 위태롭게 하거나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이 완전히 뒤바뀐다. 대부분 군중을 따르는 행동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이지만,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개인들이 말하고 실천하는 것은 사회적인 이익을 위해서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기관들은 부분적으로는 반대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지만 주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조를 억제하고 반대를 장려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심에 직면할 때 다른 사람의 견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정이야 어쨌든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불편하고도 민감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전제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본인의 전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회피하려 들지 않는 자세를 취하면서.
머리로는 알겠으나 실상 삶에 적용하는 건 꽤나 힘들다. 가족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직장 내에서 비난과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긍정하고 신뢰하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기회이기도 하다. 분명한 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따를지 안 따를지 결정하는 과정에 상당한 선행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왕이면 가장 현명하고 최선의 결정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독서신문 이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