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셰익스피어에게로 망명: 설정식, 「해바리기 소년」
[시민 시인의 얼굴] 셰익스피어에게로 망명: 설정식, 「해바리기 소년」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1.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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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해바라기 꽃이 피면

우리들은 항상

해바라기 아이들이 되었다

해바라기 아이들은

어머니 없어도

해바라기 아이들은 손이 붉어서

슬픈 것을 모른다

붉은 주먹을 빨기도 하면서

다리도 성큼 들면서

아이들은

누런 해바라기와 같이 돌아간다

태양은 해바라기를 쳐다보고

해바라기는 우리들을 쳐다보고

우리들은 또 붉은 태양을 쳐다보고

해가 져서

다른 아이들이 다 집에 돌아가도

너하고 나하고는

해바라기 가까이 잠이 들자

-설정식, 「해바리기 소년」

셰익스피어에게로 망명

‘의리’를 외치는 어떤 배우가 외할아버지가 시인이라고 말할 때 텔레비전 화면이 잠시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시를 썼다며 자작시를 낭송할 때 텔레비전 스피커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낸 것도 같았습니다. 뭔가 낯설었습니다. 그 시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설정식’이라 또렷이 말했습니다. 텔레비전 상자는 한동안 적막강산이었습니다. 아무도 설정식을 아는 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평소 그 배우를 가벼이 보았는데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설정식은 월북 문인이자 영문학자입니다. 정지용, 백석, 김기림, 이용악 등이 해금돼 부활할 때도 설정식은 몇몇 연구자 입에서만 맴돌았습니다. 그가 셰익스피어 『햄릿』을 번역했던 보기 드문 영문학자라는 것을 아는 이도 드물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며 해방기 미 군정청에서 요직을 거쳤고 미국의 식민지 정책을 간파하고 좌익 편에 서다 월북했으며 한국 전쟁 휴전 회담 때 북측 통역으로 판문점에 나타났다는 것도 결국 미국 스파이로 몰려 숙청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 「해바라기 소년」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의 불안을 담은 작품입니다. 어머니의 젖 물림을 상상하며 ‘붉은 주먹을 빨며’ 몸을 뒤척이는 아이들 속에 설정식이 있습니다.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며 슬퍼할 겨를도 없이 헤매는 어린 양들에게 태양과 같은 거대한 상징이 필요합니다. 메시아를 고대하는 고난받는 사람들 처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직접 태양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녹아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바라기 같은 매개체가 또 하나 필요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념이었건 문학이었건 말입니다. 산으로 갔던 시인들이 대부분 해바라기 소년이었을 겁니다. 설정식에게 해바라기는 시가 아닐까요. 누구도 소년들에게서 해바라기(시)를 빼앗거나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설정식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자기 이야기를 꾸몄던 시민이었습니다.

해바라기 소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왜 설정식은 여러 번 다른 선택을 했을까요. 가장 친미적인 사람이었다가 가장 극단적인 반미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얼까요. 그의 시는 왜 고향과 같은 서정을 노래하면서도 거침없는 웅변을 토해 냈던 걸까요. 그가 번역했던 『햄릿』에게로 가보려 합니다. 아버지의 불행과 어머니의 불륜을 자신의 원죄로 받아 내야 했던 햄릿의 번민이 새삼스럽습니다. 태양과 직접 맞대응하는 것처럼 햄릿은 고개를 들지 못했지 않나요. 그에게도 설정식이 노래했던 해바라기가 절실했는데 그것이 무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서 헤맬 뿐입니다. 햄릿처럼 설정식은 무엇도 선택한 바가 없습니다. 단지 역사의 악몽이 그에게 문제를 던졌을 뿐입니다. 그가 풀지 못한 문제는 우리 시민들 이야기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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