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일기장을 덮어놓고 천장을 보면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기분도 남 눈치 보면서 들고 생각도 다른 사람 허락받고 한다니. 취향과 호오의 기준이 내게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정말 좋은 건지 자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게 된다. 나는 뭐 하나 하려고 해도 늘 누가 옆에서 지켜봐 주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득 외롭다. <33쪽>
밤을 즐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일을 축내서 오늘의 아쉬움을 희석하는 사람들. 나는 밤이 되면 당신들의 밤도 나 같은지 궁금하다. 당신도 나 같은 새벽 2시 21분을 보내고 있는지. 당신도 지금처럼 어두운 밤에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는지. 아니면 마주 보고 있는지, 매만지고 있는지, 안고 있는지, 멀리 던져두고 있는지. 당신도 나처럼 이것들에 대해 서로 꺼내놓고 자랑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45쪽>
어릴 때는 아직 간지러워서 못 쓰고, 그 또래가 되면 괜히 싱거워서 안 쓰고, 시간이 지나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못 쓰는 단어. 청춘. 자음과 모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과 ㅊㅊ이 들어가는 발음 소리, 푸른 봄이라는 뜻까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데가 없지만 도무지 언제 써야 할지 모르겠다. 어렴풋하게 지금이 그 순간이고 스멀스멀 지나고 있다는 걸 알아도 어떻게 쥐고 있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56쪽>
시인은 술도 밥도 그냥 먹지 않고 비도 허투루 맞지 않는다. 시인은 사람들이 피하는 눈과 비와 해풍도 동해 오징어처럼 처절하게 얼리고 녹이고 말리는 데 쓴다. 글씨 쓸 줄 알면 글도 써지는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검은색을 설명하는 일. 검은색도 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표현이고 검은색은 반사해낼 빛도 없는데 시인은 설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72쪽>
내가 기억하는 내 평생 동안 행복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추앙하다 보니 행복에 대해서 어렴풋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 행복한지를 되도록 떠올려보지 않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내가 지금 집중을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집중이 끝난 순간인 것처럼, 행복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맹목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타인의 행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92쪽>
몸 말고 마음도 감기에 자주 걸린다. 마음에 감기가 걸리면 나는 늘 새벽과, 술과, 관성 같이 담배를 찾게 된다. 아무래도 마음 안의 덩어리들을 뽑는 동안 긁힌 상처를 닦아내려면 몸을 해쳐야 하는 건가. 몸이 덜 아플 때가 많으니 자꾸 몸의 피를 빼서 마음에 수혈하게 된다. 내가 규정하는 나는 세포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생각에, 나를 챙기려고 눈을 자주 감는 편인가 한다. <132쪽>
네가 밉다고 할 때는 다섯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열을 세고 말하기로 한다. 말이 앞서고 글이 앞서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하기로 한다. 상대의 표현이 서툰 것을 보고 마음이 작다고 여기지 않는 사려가 있으면 좋겠다. 내 비유와 언어유희가 또 내 마음을 새치기했다고 알려주기로 한다. 내가 미안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운 사람에게 저울질한 마음 만큼만 내밀기로, 그 마음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며 살기로 한다. <123~125쪽>
[정리=한주희 기자]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지음 | 위너스북 펴냄 | 168쪽 | 1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