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운명을 거슬은 사랑: 최소월, 「별(別)」
[시민 시인의 얼굴] 운명을 거슬은 사랑: 최소월, 「별(別)」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11.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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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등교의(藤交椅)에 유연(悠然)히 안진 저(這)의 님의 자태(姿態)

 고귀(高貴)도 하지, 나는 ‘바다가 조와요’…………

‘가고 십지 안어요’ 난간(欄干)에 두 손을 언지며, 미소(微笑)로,

‘가지마지……’ 크게도 못하고

‘가야하지오?’ 얼마 잇다가, 어두어감을 보고.

‘네……’ 마지못한 대소(對笑)이라. 두 사람의 눈은 저녁

 빗과 갓치 희렷도다.

보신각의 큰 종이 뎅뎅 자정(子正)을 고한 뒤의 한양(漢陽) 밤

 공기(空氣)갓치 만낫다가 헤여진 후는 적막한 것이라.

두 사람은 그것을 알엇스나, 헤어짐이라. 길에 가다가,

‘인제는 저(這) 바다가 안이 보이지’ 얼골이 엇더한지 보이는 듯.

‘인제는 안이 보이지오--- Fare thee well이라’

슯흠으로

-최소월, 별(別)

운명을 거슬은 사랑

우리에게 소월(素月)이 둘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북에 김소월, 남에 최소월입니다. 누가 먼저였을까요. 아마도 김소월이 최소월을 이어받았을 겁니다. 최소월의 본명은 1910년대 “너를 혁명하라” 외쳤던 최승구(崔承九)입니다. 염상섭 소설 「추도」에 등장할 정도로 멋진 선각자였습니다. 시문에 능하고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민족 독립을 꿈꾸었지만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늘 이처럼 귀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가 봅니다.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학지광』을 기획하고 편집하며 구성원들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혜석과 나누었던 사랑이 전설처럼 남았습니다.

이 시 「별(別)」은 나혜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이별하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1915년에 쓴 시니 백 년도 넘은 시절입니다. 둘은 일본에서 만나 소월(素月)과 정월(晶月)로 필명을 짓고 문학과 예술을 같이하며 인습과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동지적 연애라고 할까요. 아직도 젠더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요즘에 ‘소월’ 즉 ‘흰 달’처럼 소박한 남자와 ‘정월’ 즉 ‘밝은 달’처럼 빛나는 여자가 만나 운명에 맡긴 삶을 거부한 사실이 놀랍습니다. 소월은 부모 뜻에 따라 조혼(早婚)을 해 유부남이었습니다. 정월은 고관대작과 혼인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운명은 둘을 갈라놓았고 정월이 수원 본가에 갇혀 살게 된 때 일본에서 건너온 소월과 아쉬운 만남이 눈에 선합니다.

두 사람은 한양 종로에 마주 앉아 이제 마지막인 듯 서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머뭇대고 있습니다. 결국 소월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후 정월이 김우영과 결혼하고 신혼여행 대신 소월 묘소를 찾은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오늘날도 파격이 아닌가요. 후대 연구자들이 소월의 문장이 정월에게 이어져 구현됐다고 평합니다. 하지만 정월의 남은 삶은 소월의 죽음으로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래도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소월의 진취적이고 혁명적인 정신은 정월에게도 이어져 무소의 뿔처럼 나아갔습니다. 운명을 거슬러 가는 자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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