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최문자 시인 “문학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뇌… 그 길을 걷는다”
[명사에게 듣다] 최문자 시인 “문학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뇌… 그 길을 걷는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10.16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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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땅을 차지했지만
나는 반짝이는 적들 앞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동전 한 닢조차 줍지 않았다

-최문자, 「재」 부분(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中)

작가든, 독자든 문학을 경건하게 대하는 태도가 희귀해진 세상이다. 창작 환경과 트렌드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문학 전반이 위기를 맞고, 대의에 투신하기 어려워진 사회 풍조의 영향도 클 테다. 그런 시대에도 마치 구도자와 같이 하루하루 자신을 깎아 나가는 시인이 있다. 우리 문단의 대표적인 여성 원로, 최문자(79) 시인이다. 세계의 명산은 다 다녀 보았다고 할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던 그는 5년 전 대학 석좌교수직에서 물러나고부터 모든 일과 취미를 접고 오직 창작에만 몰두하며 극단적으로 절제된 생활을 해 왔다. 인생에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해엔 인생 첫 산문집이자 시론을 갈무리한 책을 냈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시적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깊은 여운을 남겨 가곡으로도 널리 불린다. 대표작 「닿고 싶은 곳」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본, 각기 다른 방향으로 쓰러진 나무들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는 발견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고독이 깃들어 있다. 여든 살의 나이에도 이러한 창조에 다다르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정신적 쇄신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을 것”(마태 17:20)이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지난 5일, 최문자 시인을 만나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그의 문학적 여정에 관해 물었다.

Q. 안녕하세요. 독서신문의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50년 이상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자 시 이외의 것에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나머지 여러 일에 유능하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일과도 그래요. 산책 갔다 와서 커피 한 잔 하고 시 쓰고 책 읽고, 이런 생활의 연속이에요. 전에는 영화 보기나 여행도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다 체력 소모가 되기에 조심하고 있어요. 시에 평생을 바쳐 왔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Q.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시인으로 거듭나기 이전의 기억도 궁금합니다. 유년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나요?

“서너 살 때 이미 한글을 익혀 낙서를 하기 시작했어요. 실은 그때부터 시를 썼다고 볼 수 있지요. 누가 나쁜 짓 하면 대자보도 써서 붙이고, 집에 꽃나무가 많아 꽃나무에 대해서도 쓰고요. 아버지께서 사람들 오면 그걸 자랑스레 보여주곤 하셨죠. 그런 게 다 시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일찍부터 남다른 독서 활동을 했어요. 기껏해야 중학생 때 지금 대학생들이 읽는 교양도서를 다 읽고, 하물며 『김일성 평전』 같은 절대 금서까지도 어렵게 구해 탐독했으니까요. 시도 많이 읽었죠. 영미 시 전집을 좋아해서 다 외우고 다녔어요. 그 당시에 한 독서가 없었으면 오늘날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필독도서 같은 책도 유익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읽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책이 기억에 오래 남아요.”

Q. 지난해 이형기문학상 수상 이후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려 한다”는 포부를 밝히셨는데요.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유학을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계획은 아니고요. 미국 출판사에서 시집 영역본을 내기로 했는데, 그 진척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떠나게 된다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나라인 네덜란드에서 한 달 정도 방을 빌려 지내다 올 것 같아요. 새로운 시집도 구상 중에 있는데 간만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얻고, 폭넓고 다양한 사유의 기회를 가져 볼까 합니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직 없지만 올해 안으로 떠나 보려고요. 건강과 모든 여건이 맞아야 하겠지만요.”

Q. 대학 총장을 역임할 정도가 되면 사회적 명성과 나이 등의 영향으로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어느 정도 활동 반경이나 생각의 반경이 제한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끊임없이 가치를 이동하며 예술의 세계를 꿈꾸는 노마드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시피, 여전히 자유롭고 열려 있는 사고로 생활하시는 듯해 신기한데요.

“확실히 굳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얼마 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봤더니 뇌 나이가 20대라더군요. 매일매일 뇌 훈련을 하는 셈이니까 의식이 천천히 늙는 것은 시인의 좋은 점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은 자유다. 자유를 위해 정주에서 유목으로 가라’고 했는데, 특히 시인은 자유롭지 않으면 두려움과 충동으로부터 탈출하기 어려워요. 쓰기는 어렵고 때로는 고통이지만, 한편으로는 읽고 쓰는 재미 또한 대단합니다. 자유는 나의 해방인 동시에 타인도 해방시켜요. 돈만 벌다 죽기는 싫습니다. 집은 베이스캠프로 두고, 여행하듯 자유의 지평을 계속 넓히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Q. 가장 최근 저서인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는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열 권 가까이 시집을 낼 동안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산문집입니다. 본문에서 “시 말고 다른 글을 쓰는 것은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고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나요.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하고, 산문도 많이 썼어요. 그간 산문집을 내지 않았던 이유는 시가 전부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나이를 많이 들고 보니까 제 시에 대해 산문으로 설명하는 책도 한 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책은 한 시기에 쓴 글을 모은 것에 가까워서 좀 더 특정한 주제에 천착한 산문집을 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지만, 제게는 지금 시 쓰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기에 또 산문집을 내기는 쉽지 않을 듯해요.”

Q. 그간 시집에서는 조심스럽게 다뤘던 기독교적 상상력이 전면에 드러난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전과 다른 표현법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궁금했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신학과 문학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쓴 논문도 몇 편 있어요. 성서에 등장하는 일반적 요소들인 전쟁, 죽음, 공포, 슬픔, 애증, 미움, 불만, 번민, 사랑, 미움 등은 문학적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질문이 등장하나요. 문학이란 결국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도 분명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 직접적인 표현은 경계해 왔지요. 진리를 삶에 적용해 주는 것이 신학자의 역할이라면, 진리를 더 상상하고 숙고하게 도와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Q. 시를 대하는 자세의 진지함이 유독 돋보이는 시인입니다. 세상이 알아 주지 않을 때부터 자신만의 뚝심을 유지하며 열 권 가까이 시집을 내 오셨는데, 감회가 어떠신가요.

“권수로만 따지면 남보다 적게 낸 편이죠. 많이 내는 사람들은 수십 권도 내니까요. 하지만 뼈를 깎는 변화 없이 그저 시류에 따라 시집을 많이 내는 시인이 부럽지는 않아요. ‘시집 한 권 낼까’ 하며 무심히 책을 내는 걸 못 견디겠어요. 글 앞에 겸손하고 글을 무서워해야 돼요. 윤동주도 시가 쉽게 씌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국문학사에 남은 시인들은 다 그랬어요. 이상이 신문 연재 끊겼다고 시를 사람들 입맛에 맞게 고치지 않았어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한 권의 시집을 낼 때마다 저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변화시키고자 애를 씁니다. 변화라는 게 말이 쉽지만 참 쉽지 않은 일이에요. 들뢰즈는 반복하는 이유가 차이가 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차이가 생기기 전의 그 적막감과 열패감이 어려운 것 같아요. 문학적 변화는 돈을 억만금 갖다 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썼음에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다른 요소에 의해서 평가되어 버릴 때의 고독감 같은 것들을 견디기도 만만치 않죠. 여기서 무너지면 남들이 쓰는 것, 달콤한 것을 쫓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 세계를 잃어버려요.”

윤동주 시비 앞에 서 있는 최문자 시인
지난 5월 박경리문학공원 문학의 집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 행사에 참석한 최문자 시인

Q. “작가가 수없이 많은 문제를 지니고 살아가는 한, 어떤 형태로든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다”라며 세월이 흘러도 괜찮아지지 않는 삶과 관계의 불편함, 고통 같은 것들을 날카롭게 포착하려는 의지가 돋보였습니다. 시인은 어떤 존재라고,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시가 아니었으면 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예요. 시인들 성질 고약해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두려움, 공포, 번민, 뜨거움, 난해함 같은 결점이 많은 존재들이죠. 그런데 결점이 많아야 해요.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야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지, 매끄럽기만 해서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시를 쓸 수 없어요. 그러니까 멀쩡하게 거죽만 시인이라고 하고 다닐 게 아니라 몸속의 수분 하나하나까지 다 시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당장은 멸망하는 것처럼 보여도 멸망이 아니죠. 100년 뒤에라도 최고의 시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Q. 최문자라는 시인의 시적 여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최근에는 어떤 주제와 항로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최근의 관심사는 미래예요. 앞으로 올 시간들에 대해서, 그 시대를 살아갈 사물들에 대해서. 거대한 지구는 물론 작은 벌레들, 미물의 미래까지 예측해 보는 일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만 썼기 때문에 이제 미래에 대해 써 보려고 합니다. 약간은 SF적인 내용이 될 수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는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어요. 자크 아탈리의 『살아남기 위하여』, 미래에 대한 대 예측이 담긴 책입니다.”

Q.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전염병-재난으로 이어지는 공통된 불행 앞에서 모든 멈춤은 어쩌면 미래가 지속될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언제고 멈춰 서고 뒤돌아보고 불행을 선회할 수 있다면, 시 한 편은 소중하다. 시 한 편은 위대하다”는 구절은 ‘왜 시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시인만의 대답처럼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 주신다면…

“우리나라의 독서 교육은 정말 살인적인 독서 교육이었어요. 단어 하나하나에 칼질하듯 밑줄 그어 가며 도식적으로 해석하는 게 목표였죠. 전체적인 시의 모티프를 읽는 법이라든지, 비교훈적인 문학 읽기를 가르치지 못했어요. 이로 인해 우리 사회가 참 많은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한 것도 독서였어요. 어떤 일도 글을 읽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요. 의학도, 법학도 글 속에 답이 있지요. 우리는 더 많은 답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독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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