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âneur’는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불어 단어다. 이 단어를 ‘열정적인 관찰자’로 새롭게 정의한 이는 시인 보들레르다. 플라뇌르는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관찰하고 머리로는 사고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사람이다. 그렇게 걷다 만난 것들을 그러모아 삶의 연료로 쓴다. 더러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음악을 만든다. 이들은 도처에서 자신의 익명을 즐기며 마주치는 것들로부터 즐거움을 얻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비구름을 만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발견은 행복하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서 잠시 비켜나 있는 존재. 어쩐지 육아하는 우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부모들은 훌륭한 관찰자다. 그러나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다. 다만 무대 전면에 나서기보다 배경으로 비켜설 때 더 편안하고, 행동보다 관찰을 좋아할 뿐이다. 그들에게 관찰이란 게으름도 물러섬도 아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기를 볼 때도 그렇다. 심란할수록 나노 단위로 훑을 게 아니라, 간격을 두고 바라봤어야 했다. 아기가 왜 자꾸 깨는지 몰라 수소문해 봐도 답이 없었다. 수시로 젖을 물리고, 영아 산통 분유를 사고, 전문가를 만나고, 백색소음을 틀어주고, 노래를 부르고, 업고, 안고…… 통잠을 재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니 알겠더라. 아이는 더워서 그랬다. 춥지 않은데 내의를 껴입히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줬던 게 화근이었다.
이처럼 거리가 멀어질수록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다. 한발 먼 관찰자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것들 말이다. 아이 서너 살 땐 최대한 많은 말을 해주고 이것저것 정해주려니 끝이 없었다. 허둥대다 지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변을 산책하는 관찰자’로 물러나면 그때 필요한 게 딱 보였다.
눈에 쌍심지 켜고 찾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 찾기를 포기한 순간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다행히 재촉하지 않고 조금 물러나는 태도는 아이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이로선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시행착오를 겪을 소중한 기회를 버는 셈이니 말이다.
몇 해 전 에르메스가 플뢰뇌르를 모티브로 전시회를 열었다. 큐레이터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산책이 당신을 유혹할 만한 경험이 되려면 여유 있고 열린 태도여야 합니다. 어느 곳을 산책하더라도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플라뇌르의 훌륭한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플라뇌르는 여유로운 산책의 움직임, 그리고 산책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감정을 포함합니다.”
정말 그럴 것이다. 당신이 어디서 뭘 하든, 설령 그곳이 젖병과 기저귀가 뒹구는 육아의 한복판일지라도. (‘산책’을 ‘육아’로 바꿔 읽어보시기를.)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한 몽상가다. 답 없는 낭만주의자다. 그렇다고 우주를 횡영한다거나, 사막을 종단한다거나, 저 너머를 탐하지는 않는다. 천사 같은 아기와 완벽한 엄마를 꿈꾸지도 않는다.
이제는 아이의 고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는 생활의 한 조각이 나의 낭만이다. 그런 날들이 영화 필름처럼, 털실 뭉치처럼 매일 감긴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함께 그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고 영화를 틀어 볼 테다. 이보다 부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