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아직은 역사 앞에서: 조지훈, 「역사 앞에서」
[시민 시인의 얼굴] 아직은 역사 앞에서: 조지훈, 「역사 앞에서」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9.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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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만신(滿身)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틔어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敗者)의 영광(榮光)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虛空)에 못 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永遠)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渺漠)한 우주(宇宙)에 고요히 울려가는 설움이 되라.

—조지훈, 「역사(歷史) 앞에서」

아직은 역사 앞에서

조지훈을 전통 민족 서정에서 구해 내 시민 시인의 반열로 데려온 사람은 김수영입니다.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시인이 우겨대니//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수영이 쓴 「김일성 만세」 일부입니다. 1960년 4·19혁명이 막 일어났던 때입니다. 조지훈은 ‘청록파’의 일원에서 시민 혁명의 맨 앞에 섰습니다. 그가 김수영과 자유에 대해 달리 생각을 품었다 해도 시민의 자유를 김수영과 이야기할 만한 시인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정지용이 그를 <문장>지에 추천했을 때부터 그는 시민 시인이었을 겁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일제 식민시기에 펼친 민족 시인으로서의 면모 중 우리말에 쏟았던 마음을 그는 기다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곧 해방을 맞으리라는 의지이지요. 이는 백석이 정주 지방 사투리를 시에 장착했던 그리움의 정서와 견줄 만합니다.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가 영국 치하에서 아일랜드말로 글을 썼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조지훈의 문학은 보편적입니다.

시 「역사 앞에서」는 1959년 이승만 독재가 종말을 보일 때 출간했던 시집 『역사 앞에서』 중 표제 시입니다. 소수자는 역사 앞에서 늘 패배자입니다. 피로 얼룩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삶 때문입니다. 미친 듯 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곧 노래가 되어 만인의 입에서 불리게 될 것을 시인은 믿습니다. 언제가 도래할 내일의 영광이며 보람입니다. 역사 앞에서 시민이 겪는 설움이 저 아득한 우주에까지 가 닿을 것이라 시인은 계시합니다. 시민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하늘을 움직여 역사로 이어질 때가 오리라 예언하는 것이지요.

시민 시인으로서 조지훈의 진면모는 이 시보다는 시 「병(炳)에게」에 잘 담겼습니다. 이 시는 1968년 5월 17일 조지훈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시입니다.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탈복(說服)하려 들다가도/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라고 병을 친구처럼 대하네요. 헤밍웨이도 『노인과 바다』에서 원수 같은 상어를 친구라 여깁니다. 임화도 시 「적」에서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사랑스러운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라고 노래한 것을 기억하나요. 시민은 살아가기 위해 적과의 동거도 마다하지 않으니 삶은 절실한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아직은 슬픔을 기쁨으로 역전시키는 기적이 필요하니 아직은 역사 앞에서 서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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