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병에 담가놓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 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 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社)에 마주 앉아 붓대를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장자(腸子)가 꾸여져 까마귀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上海)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든 이 박군은
눈을 뜬 채로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심훈, 「박군(朴君)의 얼굴」
빼앗는 얼굴과 만나다
우리 시인들은 다재다능합니다. 나혜석, 임화, 권환, 오장환, 김수영 등이 문학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화가이거나 영화, 연극인, 언론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예술 문화를 선도하는 셀럽(celebrity)에 버금갑니다. 심훈도 이들의 이야기 속에 없어서는 안 될 시인입니다. 1920~1930년대를 전방위로 불꽃처럼 살다 갔습니다. 그럼에도 심훈은 소설 『상록수』에 갇힌 듯합니다. 임화가 심훈을 통속작가로 규정한 이후 아직도 계몽소설 작가로 평가된 채 있습니다. 한창 문학 작품에 빠졌던 때 『상록수』를 읽으며 떠올렸던 일들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보다는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러브 스토리였습니다. 그들처럼 농촌 현장이든 어디든 가서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품었지요. 그 때문에 문학사에서 저평가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 「박군의 얼굴」에서 심훈의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얼굴은 세 명의 청년 박 군과 만나면서 새로운 시간 속에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 삶에 얽매여 고독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세 명의 박 군 때문에 지금껏 자기중심 속에 갇힌 얼굴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1~3연에 등장하는 박 군은 1927년 11월 22일 감옥을 나서는 친구 박헌영입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보며 분노와 자괴감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4연에는 시대일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 박순병의 참혹한 죽음을 담았습니다. 창자파열로 옥사한 그 때문에 그의 몸 구석구석이 파열된 듯합니다. 5연은 심훈의 또 다른 친구 박열의 이야기입니다. 1922년에 옥에 갇혀 오 년 정도 지난 때였는데 미래에 감옥을 나서는 그를 그리고 있습니다. 박열의 얼굴을 대하고 비로소 미래의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들 세 명의 박 군 얼굴은 심훈의 지나간 시간을 빼앗아 새롭게 역사에 올려놓습니다.
심훈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입니다. 그는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라면 사치스러울까요. 아니면 자탄적 자기 무능이라 치부해 버릴까요. 그는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입을 벌리고 독한 술잔으로 들이붓는다”고(시 「조선은 술을 먹인다」 中) 씁니다. 마침내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을 녹이려 한다”고 통곡합니다. 세 명의 청년 박 군은 잃어버린 고향 같습니다. 심훈의 마음은 그들과 같이했습니다. 술에 취해 세상을 등졌다고 비난받는 그들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아’였으며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이기에 심훈은 그들의 얼굴 속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