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영원히 푸른 잎도 있다. 죽지 못하고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과 고통에 시달리는 늘푸른잎이다. 어쩌면 길고긴 푸른빛으로 된 고통이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잎이 동물을 잡아먹거나 거목을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다. 신은 많은 잎을 세상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왜 세상은 푸르지 않을까? 그러나 잎으로 산다는 것은 잎이 없는 환멸의 경우와는 다르다. 끝난 자리도 충분히 숭고할 수 있다. <18~19쪽>
등록금과 취업과 아르바이트. 외국어에 대한 압박. 맘놓고 맘에 드는 책 한 권 느긋하게 읽을 수 없는 시간의 필름들은 빠르게 돌아갔다. 이런 젊은이들을 지켜보면서, 시인이자 문창과 교수로 ‘그래도 목숨 내놓고 창작에 열중하라’는 말을 시를 전공하는 제자들에게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저 안타깝고 착잡한 생각에 빠진다. 가끔 표정이 아주 어두운 학생들과 스치거나 마주칠 때가 있다. 나까지 한순간 몹시 우울해진다. 이 찬란한 여름에 무성함과 무관한 깊은 우울의 사정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61쪽>
꽃들은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공허한 내 등뼈를 구경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꽃이 없어졌을까. 언제부터 이곳에 이처럼 딱딱하고 굵은 슬픔 한 줄 그어져 있었을까. 그동안 산맥과 구름 사이에 너무나 많은 꽃잎을 날렸다. 어떤 슬픔인지도 모르는 그걸 멈추려고 거기다 너무나 많은 못을 박았다. <64쪽>
젊은 시절, ‘시론’을 정립한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학생들에게 저 속에 시의 비밀이 있다고 가르쳤다. 위증한 듯해서 강의 끝나고 땀을 흘리며 곤혹스러워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시의 비밀은 현존하는 듯해도 존재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운동한다는 걸 그때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시의 비밀은 나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살아 있고, 모든 사물들은 비밀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학생들은 그때 이해했을까? 시가 갖는 비밀을 그냥 사과라고, 옥수수라고 부르며 가르친 듯하여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106쪽>
예전에 나는 어떤 정신과 의사로부터(그는 내 친구의 담당 의사였다) “말해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해버리는 것은 문을 여는 것이다. 불쾌한 느낌,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면 영락없이 찾아드는 불행이 있다. 이 막연한 어둠의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와 조금은 말해야 한다. 절박할수록 나는 문을 열었다. <172쪽>
[정리=김혜경 기자]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최문자 지음 | 난다 펴냄 | 200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