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2021년 1월, 직장암으로 장장 스무 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마친 故 류이치 사카모토는 병실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가 음악을 맡은 1990년 영화 <마지막 사랑>의 대사이기도 한 이 말은 그가 71년 일생을 정리한 유고집 제목으로 남았다.
지난달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는 서울 중구 남창동에 위치한 전시 공간 ‘피크닉’과 공동 주최로 유고집 출간을 기념하고, 류이치 사카모토를 추모하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보다 높게, 보다 빨리, 이런 식의 경쟁에 열광하는 것은 지극히 우생사상에 가깝다. 그렇지 않은 사회를 지향하고 싶다.”
“내게는 음악이 마루턱의 찻집 같다/아무리 지쳐 있어도 그것이 보이면 달음박질하게 되고, 주먹밥 하나 먹고 나면 남은 절반의 등산도 문제없다.”
전시 후반부에는 그가 긴 투병 생활 중에 자필, 컴퓨터, 아이폰 등으로 기록한 메모와 일기 속 문장들이 벽면에 적혀 있었는데, 사회와 음악에 대한 짧지만 깊은 통찰이 담겼다. 그런가 하면 영화 <패터슨>을 보고 시인 프랭크 오하라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에게 흥미가 생겼다거나, 아폴리네르의 소설과 일본 고전 『쓰레즈레구사』가 동시에 읽고 싶어졌다거나, “나는 고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등 몸에 밴 독서 습관도 곳곳에서 엿보였다.
애서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36회에 걸쳐 잡지 <부인화보>에 추천도서 코너인 ‘사카모토 도서’를 연재하기도 했다. 유고집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에필로그에서, 편집자 스즈키 마사후미는 말년의 류이치 사카모토와 독서 생활에 관한 대담을 나눴던 일화를 소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사카모토 도서』라는 제목으로 향후 출간 예정이나, 미리 공개된 ‘최근 몇 년간 소중하게 읽어 온 책’ 목록만으로도 흥미롭다.
국내에 출간된 책 위주로 살펴보자. 먼저 나가이 가후의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은 일본 근대화 시기인 1910년대 초 쓰인 도쿄 시내 산책기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스즈키 마사후미에게 보낸 첫 메일에서 “이미, 혹은 서서히 망가져 가는 도쿄시를 개탄하는 책입니다. 본 적 없는 옛 도쿄가 그리워집니다”라며 대뜸 이 책을 언급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옛 도쿄의 풍경과 나가이 가후의 스승 격인 모리 오가이 등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가 꼽은 책 목록에는 모리 오가이의 소설집과 함께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동서고금의 철학과 종교 사상을 두루 다룬 『의식과 본질』과 더불어 『노자 도덕경』, 『장자』, 『무문관』 등도 포함됐다. 바흐와 드뷔시, 존 케이지, 비틀즈, 장 뤽 고다르 등으로 대표되는 서양 예술과 미학은 물론 동양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 덕분일까, 그의 음악과 행보는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71년은 짧다면 짧다. 하지만 그의 71년은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시간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선으로 그려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복선화된 시간이 동시에 내달려 온 71년이었다.”
생의 마지막 나날까지 책을 읽으며 지성의 날을 갈았고, 고서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복에 대해 기쁜 얼굴로 말했다는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편집자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에서 하이쿠 시인 도미자와 가키오의 대표작을 언급했다. “나비의 낙하/그 소리 크게 울린/얼어붙은 날”. 스즈키 마사후미는 그를 “발언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 발언하고 표현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이제는 “우리가 ‘사카모토’가 되자”는 말로 책을 끝맺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