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설립되어 교보핫트랙스의 전신이 된 ‘교보문보장’이 돌아왔다. 그 이름을 이어받은 ‘문보장’은 ‘문구의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읽고 쓰는 데 진심인 사람들을 위한 문구 편집샵이다. ‘도심 속 문구 아지트’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주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문구 아이템을 선보인다. 지난해 10~11월 서울 성수동에서 문보장 팝업스토어를 열고 방문객의 반응을 살핀 결과, 2주간 약 1만명의 고객이 방문하고 30~40평 되는 공간이 방문객의 손글씨로 꽉 채워지는 등 문구에 대한 식지 않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성원에 힘입어 지난 달 1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문보장 1호점이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 16일에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문보장’ 오픈 기념 『문구는 옳다』 북토크가 진행됐다. 자타공인 프로문구러 저자 정윤희가 문구 덕후들에게 흥미진진한 문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무궁무진한 문구의 세계를 열어주는 시간이었다.
먼저 정윤희 작가는 문보장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저는 문보장과 인연이 깊어요. 방송 구성 작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저에게 필기구는 전쟁터에서의 총과 같았어요. 어떤 필기구를 가지고 갔느냐에 따라 아이디어 회의나 인터뷰 자리에서 얼마나 더 많이 적어 올 수 있는지 달라졌으니까요.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면 된다지만 그때는 아날로그적인 요소가 강했어요. 동료 작가들과 놀이터 가듯 문보장에 놀러 다니고 문구 정보를 공유했어요. 그래서 작년에 문보장 팝업스토어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향을 찾은 기분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어엿하게 ‘국민 만년필’ 자리에 오른 ‘라미 사파리’와의 첫 만남도 교보문보장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했다. 2000년대 후반 쯤 처음으로 라미가 교보문보장에 입점했을 때 구매했다고 했다. 『문구는 옳다』에는 정윤희 작가가 라미를 처음 만난 순간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라미 만년필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중략) 라미 사파리를 집어든 건 지금 패턴과는 완전히 다른 컬러감 때문이었다. 블랙과 무채색, 메탈이 전부였던 내 만년필 라인에 엣지를 넣어주는 정도랄까. 솔직히 호사로운 필기구의 가격이 빌런이라면, 라미 사파리의 가격은 엔젤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색상은 미국의 스쿨버스를 연상케하는 블랙 닙에 샛노란색을 골랐다. 모던함이 마음에 들었다. 컨버터도 없이 함께 구입한 잉크 카트리지를 넣고 기대감 1도 없이 써내렸다. 이건 뭐지? (중략) 진짜 신선했다. 연필의 사각거림과 다른 업그레이드 버전의 사각거림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라미야,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책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정성스럽게 밑줄을 긋는 용도로 딱인 ‘펠리칸 듀오 하이라이터 형광 만년필’도 교보문보장을 통해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대형 서점 문구 코너를 지나다 묵직한 컬러로 진열된 만년필 무리 속에서 엄청 튀는 색상 때문에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광색 만년필이라니!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는데, 세상에 단순히 만년필 바디 컬러가 형광인 것이 아니라 형광색 전용 잉크를 넣어 쓰는 하이라이터 만년필이었다. 항상 펜을 저지를 때마다 엄청난 자기 합리화를 앞세우곤 하는데, 이번 경우도 예외 없이 ‘놀라워, 이건 혁신이야!’, ‘어머, 이건 꼭 사아 돼!’를 외치며 지갑을 열었다.”
정윤희 작가는 문보장에서 만년필을 샀을 당시를 회상하며 점원에게 문구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 당시만 해도 만년필을 구경하거나 구매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매장에 계셨던 점원분들이 설명을 잘 해주셨어요. 팁도 많이 주셔서 그때 배운 것이 참 많거든요. 요즘은 온라인 시장이 주가 되서 그런 재미를 찾기 어려워졌는데, 간만에 문보장에 와서 점원에게 설명을 들으니까 ‘그거 주세요, 그거 주세요’ 했던 옛날이 떠올랐어요”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정윤희 작가는 각자의 인생 문구 찾기를 돕기 위해 연필, 볼펜, 만년필, 홀더펜슬 등 대표적인 필기구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네스프레소 캡슐을 재활용해 만든 친환경 볼펜, 우주에서도 써지는 스페이스 펜, 잉크의 흐름이 훤히 보이는 유리 만년필 등 스페셜 문구를 소개하며 문구 스펙트럼을 넓혀줬다. 끝으로 자신의 문구함을 가져와 새롭고 신기한 문구 아이템을 보여줬다.
이번 북토크에 참여한 관객들의 무릎에는 저마다 손에 익어 보이는 필기구와 수첩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 종류와 컬러가 다양하고 화려하니 서로의 필기구를 흘긋거리기 바빴다.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그럴 수 밖에. 행사가 끝나도, 폐점 시간이 다 돼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 문구 덕후들의 수다는 끝날 줄 몰랐다. 멋진 붓글씨로 책에 사인을 해주는 저자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고, 소중히 품고 온 만년필을 자랑했다.
가만 보고 있자니 이들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편리한 온라인 쇼핑도, 총알 배송도, 직구도 아닌 문구에 대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문보장이 이토록 반가운 건가 싶다. 사인할 때 말고는 펜을 잡을 일이 없는 당신이라도 일단 이곳에 오면 뭐라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을 것이다. 그저 들었다 놨다 만지작거리기만 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문구를, 문보장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