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이육사, 「황혼」
[시민 시인의 얼굴]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이육사, 「황혼」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7.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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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황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시민 시인으로서 이육사만큼 앞자리를 차지하는 시인은 없습니다. 시인의 풍모로서 가히 따를 자가 있을까요. 물론 육사를 신격화하거나 영웅시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시와 시인이 일치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많습니다. 시는 좋은데 사람이 왜 그래, 아니면 사람은 좋은데 시는 별로야. 쓴 시처럼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시를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대부분 위선이나 위악을 가장하기도 하지요. 우리 시인 중에 기다리는 힘이 센 사람이 몇 있죠. 김기림, 백석, 오장환, 이용악, 윤동주 등. 눈물에 싸여 삶을 소진하지도, 시민을 배반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육사는 단지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일제와 정면에 서서 마지막 불꽃까지 불태웠으니까요. 그가 쓴 시가 그 발자취였으니 읽을 때마다 눈물 납니다.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니체가 말한 신과 대면하고 있는 단독자, 즉 최후의 가련한 인간이기를 거부한 자이기도 하고, 하이데거가 말한 여행자, 즉 잡담과 호기심으로 점철된 생활에서 도피하기를 결심한 자이기도 합니다. 어렵지요. 그럼 신동엽 서사시 『금강』에 등장하는 미래에 오는 이, ‘신하늬’이거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든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이 고대하는 메시아, 토루크 막토이면 어떨까요. 시 「황혼」에는 시공을 초월해 여기저기 존재하는 초인이 있습니다. 그는 ‘황혼’으로 변신하여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루를 힘겹게 살고 돌아오는 그 순간 장엄하게 우리를 맞이합니다. 아무런 구분 없이 별들에게도, 수녀들에게도, 수인들에게도, 행상대에게도, 토인들에게도, 모든 골방에 숨죽인 존재들에게 시냇물처럼 흘러넘쳐 옵니다.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갯짓을 한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면 이 시는 무언가 밝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황혼녘이 돼서야 하루를 지내온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은 반복 속에 회전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거듭 새롭게 변신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새로운 나, 지금까지 없던 나와 만나는 일입니다. 어제의 고통과 모멸에서 벗어나 해방 일지를 쓰는 겁니다. 타자되기입니다. 타자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육사는 우리가 펼치는 이야기에 자신을 아낌없이 주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 골방에서 어서 나와 육사와 호흡하길 바랍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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