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더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
만해 한용운을 생각하면 이상합니다. 시인이었던가 싶으면 스님이었고 스님이었지 싶으면 독립운동가입니다. 조지훈은 그를 떠올리며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은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에 있었다”고 추앙합니다. 솥발처럼 세 면모가 정립(鼎立)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은 ‘임’ 찾기 게임 대상이었지요. 그에게 임은 연인이고 불타(佛陀)고 조국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답을 쓰지 않았나요. 그는 민족 시인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스승 중 스승인 그를 시민 시인으로 다시 불러 봅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시집 『님의 침묵』 서문 격인 「군말」 첫 마디입니다. ‘기룬 것’ 즉 ‘그리운 것’은 모두 임이라 말하니 임이 연인, 불타, 조국 셋만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신비평 푯대처럼 임은 단지 몇 개로 한정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립다면 모든 존재가 다 임이 될 수 있네요. 그래서 임종 때도 부인이 숟가락으로 술을 떠 입에 넣어 주었다는 염상섭에게 임은 가히 ‘술’이 아닐까요. 그런데 한용운은 이어지는 군말에서 “너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라고 이상한 말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임으로 삼으려 욕망하는 것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나 봅니다. 그는 군말 말미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처럼 그의 임은 임을 가져 본 적 없이 헤매는 우리 모두가 아닐까요.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당신’은 헤매는 양이 분명합니다. 땅도 없고 집도 없이 인격도 근거도 상실한 채 떠도는 사람들이 그의 임입니다. 임을 떠올릴 때면 온몸이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영원한 사랑도 비껴가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그들이 그립습니다. 특히 온갖 분노와 욕망으로 자기 존재를 부정할 때 임은 자꾸 눈에 비칩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든 영화 <아바타> 1편에서 자연 생명 공동체인 나비족의 인사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I see you!”, 영락없이 “당신을 보았습니다”의 영어 번역이네요. ‘본다’는 것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신동엽이 서사시 『금강』에서 하늘을 보았다고 외쳤던 것처럼 본다는 것은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고백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